칼럼 블로그

그들은 왜 지구 반대편 병역거부자에게 편지를 썼을까? 

어느 ‘전쟁저항자’의 독일 방문기

독일의 평화단체 ‘커넥션(Connection)’의 초청으로 지난 4월초부터 약 1개월간 유럽 곳곳을 누비며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아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펼쳐온 4명의 한국 청년들이 있다. 그 중 한 명인 문명진(활동명 날맹) 씨는 2011년 3월 평화적 신념에 기초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실형 선고를 받고 수감됐으며, 2013년 7월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수감기간 중 국제앰네스티 양심수로 선정되어 독일, 핀란드 등지에서 응원편지를 받은 바 있으며, 이번 강연 일정 중에 직접 편지를 썼던 국제앰네스티 회원들과 만남의 자리를 갖기도 했다. 현재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상임활동가로 활동 중인 그의 유럽 강연후기를 직접 들어보자.

국제앰네스티 파더본 지역그룹에서 만든 강연 홍보 포스터 ⓒPrivate

국제앰네스티 파더본 지역그룹에서 만든 강연 홍보 포스터 ⓒPrivate

9년의 시간

내 생애 파더본(Paderborn)이란 도시를 다시 가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출소 소식이 실린 지역신문을 오려뒀다가 보여준 국제앰네스티 회원들을 만나니 마치 스타라도 된 기분이었다.

지난 2006년 여름, 평화단체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과 독일에서 열린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RI, War Resisters’ International) 세미나에 참석했었다. 프랑크푸르트(Frankfurt) 공항에서 자전거를 기차에 실어 마인츠(Mainz)로 간 뒤에 라인강을 따라 다음 캠핑장으로 옮겨 다니며 세미나 장소인 파더본으로 향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독일에서 강연할 때 지난 경험을 떠올리며 “프랑크푸르트에서 파더본까지 자전거를 탔다”고 말했는데, 9년 전 일을 나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는 그곳 활동가들이 “프랑크푸르트가 아니라 마인츠에서 출발했다”며 정정해주기도 했다.

나에게 잊혀졌던 추억들, 예컨대 마인츠에서 고장난 자전거를 고치느라 애먹었던 일을 상기시켜주며 반가움을 표현하는 이들과의 만남에서 새삼 지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감옥에 갔다가 출소한 후 지금의 나는 그 동안 얼마나 변했고 또는 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감옥 가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

지금도 종종 집에 들를 때마다 한 번씩 어머니께서는 감옥에 다녀온 걸 후회한 적이 없느냐고 묻곤 하신다. 병역거부 결정을 두고 아버지와 연을 끊고 싶을 정도로 심하게 다툴 때 결국 어머니는 자식 편을 들어주시긴 했지만, 그때도 “정말로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냐”며 내게 물으셨다. 출소 후 자식이 변변치 않은 돈벌이로 사는 걸 걱정스레 여기셨을 터이다. 그런데 그 감옥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 저 멀리 독일로 초청을 받아 간다는 소식은 어떻게 받아들이셨을지 모르겠다.

징역 사는 거 정말 괜찮겠냐며 걱정해주듯 물어봤으나, 판결문은 달랑 “1년 6월형에 처한다”는 한 문장으로 썼던 담당 판사 얼굴도 문득 스쳐갔다.

수감 시절, 내가 지금 겪는 이 시간들이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잠겼던 적이 있다. 앞서 징역을 경험한 병역거부자들로부터 전해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혼자 갖은 상상을 하며 준비했다. 하지만 곧바로 날아드는 반말과 규율로부터 내 존엄을 지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난이도의 과제였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관심으로 캐서린 바라클라우(Katherine Barraclough) 앰네스티 동아시아 캠페인 담당관이 내가 있던 교도소를 방문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다른 이유보다도 다만 그 인터뷰 시간이나마 잠시 쉴 수 있다는 사실에 반가웠었다. 이후 앰네스티 양심수로 선정된 뒤 매일 같이 해외로부터 지지와 응원의 편지를 받았다. 감옥의 일상에 무뎌지고 무력해질 때마다 내가 지금 왜 여기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편지들이었다.

그로쓰게라우(Grossgerau) 강연장 모습 ⓒPrivate

그로쓰게라우(Grossgerau) 강연장 모습 ⓒPrivate

병역거부자가 아닌 전쟁저항자!

독일어로 병역거부자는 ‘전쟁저항자’란 단어로 불린다고 한다. 한국에서 병역거부 운동 초창기에 ‘양심’이란 단어를 두고 “군대 가면 비양심이냐”는 논리에 막혀 애먹은 걸 생각하면 차라리 전쟁저항자란 표현이 훨씬 본래 의미를 명료하게 담아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저항자라고 쓴다면 병역거부 단어 자체에서 으레 병역의무를 수행한 남성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측면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지금 한국 병역거부 수감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호와의증인’ 신도들과도 구별할 수 있는 단어인 것 같아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노이디텐도르프(Neudietendorf)라는 옛 동독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는 강연 후 토론 시간에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재 77세로, 은퇴하기 전까지 목사로 활동하며 독일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을 만났다고 했다. 독일의 경우 수감된 병역거부자는 대체복무까지 거부한 완전거부자들이 대부분인데, 그에 따르면 그들은 교도소 내 다른 수감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감옥에 제 발로 들어온 이들이기에 그 부분을 높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냉전 종식 후 독일군 규모가 줄어드는 가운데 2000년대 들어와서는 대체복무자의 수가 군복무자 수를 앞질렀고, 2011년 징병제가 잠정 유보된 뒤로는 더 이상 독일의 군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이 사라졌다면서, 자신들에게 다시금 전쟁과 평화의 메시지를 던져준 한국의 전쟁저항자들에게 고맙다는 말로 끝맺었다. 병역거부를 한 사실이 영웅이나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독일의 한 할아버지가 보여준 존경과 진심 덕분에 지난 수감기간이 떠오르며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로쓰게라우(Grossgerau) 강연에 참석한 한 노부인의 말도 기억에 남는다. 자신의 아들이 90년대 입대할 나이가 되었을 때 또래들의 화제가 대체복무로 무엇을 할지였단다. 군인이 되겠다고 한 친구가 오히려 왕따 취급을 받았다니, 그 지역 정치 성향만 유독 그랬던 건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징병제 안에서 군인이 아닌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회의 군대에 대한 생각과 반응을 엿볼 수 있었다. “대체복무 분야 중에는 앰뷸런스 운전이 ‘땡보직'”이라는 논의가 가능한 문화에서는 ‘윤일병 총기 난사’와 같은 비극이 일어날 가능성도 낮지 않을까.

그로쓰게라우 강연 후 토론 시간, 가운데가 문명진 씨 ⓒPrivate

그로쓰게라우 강연 후 토론 시간, 가운데가 문명진 씨 ⓒPrivate

대체복무제를 넘어 군대 없는 세상을 만들기까지

그럼에도 ‘전쟁저항자’들이 추구하는 평화운동의 목표는 군대 없는 세상이지, 대체복무 도입에만 머무를 수 없단 걸 강조하고 싶다. 독일에서 병역거부 사유서를 작성할 때 남의 것을 베껴서 제출해도 받아들여질 정도가 되면서,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던 시점과 독일군이 ‘전문(professional)’ 군인 모집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시점이 대략 일치했다고 한다. 또한, 독일의 대체복무를 지지했던 그룹 중에는 더 이상 값싼 노동력의 대체복무자를 구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징병제 폐지에 유보적이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대체복무제는 어쨌든 반군사주의의 1차적인 전략 중 하나일 뿐 ‘전쟁저항자’들의 최종 지향은 군대와 전쟁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독일의 평화활동가들이 자신들을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반군사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토마스, 여옥, 문명진, 다시 토마스. 흰 색 쉐프 복장 한 토마스는 90년대 초반에 병역거부를 하고 대체복무를 했다. 병역거부 사유서가 한 번에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세 번째 심사에서야 병역거부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맨 오른쪽의 토마스는 병역거부를 하려고 했으나 자신이 징병신체검사를 받을 무렵 독일 정부가 징집을 더 이상 하지 않아서 많은 이들이 쉽게 면제 처리를 받았고, 법적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자신도 왼쪽 어깨 이상으로 면제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Privat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평화활동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토마스, 여옥, 문명진, 다시 토마스. 흰 색 쉐프 복장 한 토마스는 90년대 초반에 병역거부를 하고 대체복무를 했다. 병역거부 사유서가 한 번에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세 번째 심사에서야 병역거부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맨 오른쪽의 토마스는 병역거부를 하려고 했으나 자신이 징병신체검사를 받을 무렵 독일 정부가 징집을 더 이상 하지 않아서 많은 이들이 쉽게 면제 처리를 받았고, 법적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자신도 왼쪽 어깨 이상으로 면제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Privat

 

※이 글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문명진 씨가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다음주에는 ‘독일의 분단상황과 대체복무제 도입 역사를 통해 본 한국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는 주제로 평화활동가 여옥의 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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