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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다녀오며 : 조금은 솔직해지고픈 전화모금가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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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수, 서른을 몇 일 앞두고 있는 저의 나이입니다. 20대를 돌아보며 요즘은 매일 읊고 있는 고은 시인의 [무제]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전화모금가 박나희라고 합니다. 한국지부 16,000여명의 회원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국제앰네스티 캠페인을 목소리로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지부 회원들과 전화로 나눴던 하루 하루는 벌써 2년이라는 시간으로 제게 차곡히 남아있습니다. 여러 사람보다 한 사람과의 깊은 대화를 더 좋아하는 성향 탓인지 전화모금은 제게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는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담는 것 같습니다. 산모사망에 안타까워하고 소년병 징집을 막는 무기거래에 굳은 의지를 보내는 회원들은 국제앰네스티가 회원의 힘으로 움직이는, 그래서 살아있는 곳임을 수화기 너머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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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전화모금가로 근무 중인 나

하지만 전화시간은 회원의 일상을 쪼개어 겨우 만들어 준 것임을 잘 알기에, 너무 많은 이야기는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는 글의 분량은 A4용지 한 장을 벗어나서는 안되었고 권리보유자의 이야기는 모든 회원이 전화를 끊고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폭행, 고문, 강제실종 등 자극적인 단어나 사례는 제외해왔습니다.

그렇게 2년을 보내다 보니, 스스로 의문이 들었습니다. 한국지부 홈페이지에 국제인권뉴스는 그 나라의 문화, 배경, 정치적 상황도 함께 이해해야만 했는데 사건은 매일 일어나고 있고, 윗면을 차지한 어떤 기사에 눈길을 준 만큼 주목하지 못하고 밑으로 보내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제가 전화모금으로 다루거나 한국지부 캠페인 활동에 있어서는 도서, 논문, 기사,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배경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고 토론에 참여해왔습니다. 하지만 차츰 생겨난 고민은 어느새 저의 마음을 차지해버렸습니다. ‘나는 이 인권운동을 A4용지에 담을 만큼만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닐까?’ 전화모금가로서 솔직한 이야기를 고백하자면, 저는 특정 사안에 모든 이성과 감정을 집중하기 시작하면 지금 ‘우리 회원들’과 멀어져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 장 종이 그 너머로 알거나 깊어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제가 몰입을 넘어서 그 사안에 매몰되어 버리면, 제가 가지는 문제의식이나 관심, 무게감이 어떤 회원에게는 어색하고 낯설 수 있기 때문에 제가 강요를 하게 되진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덧붙이자면, 저의 포지션에서 가장 고민이 되는 지점은 실제 사건과 권리보유자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부분입니다. 너무나 심각하고 처참한 상황을 겪는 권리보유자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고스란히 전달하게 되면, 대중이 그야말로 ‘감당’하지 못하고 충격과 공포만을 가지는데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문제의식은 가지되, 현실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권리보유자와의 접점을 찾아주어야만 하는데 그 언어와 표현방식을 찾는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2년이란 시간 동안 제가 회원에게 전하지 않으려던 현장의 이야기, 증언, 고통은 A4용지 스크립트에서 제외하다 보니, 조금씩 공허함이 제 마음 속을 차지했습니다. 전화모금가로서 제가 가지던 프레임 밖으로도 권리보유자의 이야기는 분명히 존재했으며, 스스로 선택했던 전화모금가의 위치에서부터 사안과 떨어진 거리만큼 저는 멀어져만 갔습니다. 먼 곳에 서서 인권침해 사례를 뿌옇게 확인하고 전하려니, 회원에게 미안했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현장에 가서 권리보유자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공허와 죄스런 마음을 덜고 지금까지의 관점을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국제앰네스티가 지난 5월과 10월 방문조사를 마치고 성명서를 냈던 사건이 있는 곳, 밀양 765kV 송전탑건설사업 현장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희망버스에 오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뒷산을 타고 송전탑건설현장으로 향하는 희망버스 일행

뒷산을 타고 송전탑건설현장으로 향하는 희망버스 일행

11월 30일 시청역 오전 9시 대한문 앞에 배낭을 맨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버스에 오르고 5시간 뒤, 우리는 상동면 여수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를 맞았던 것은 ‘희망버스를 탈 회비가 있거든 연말 불우 이웃 돕기에 쓰십시오’ 라는 현수막이었습니다. 우리를 반기지 않는 밀양 시민을 확인하고 우리는 일행과 함께 송전탑이 건설 중인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상동면 여수마을에 도착하고 수많은 기사와 사진 속에서만 봤던 밀양 땅을 밟고 마을을 둘러보니, 이곳에 사람이 산다는 생동감이 느껴졌습니다. 서울에서 희망버스를 탑승했던 300여명의 일행은 뒷산을 올랐습니다. 길을 바로 따라 가면 입구에서부터 경찰과의 대치를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산을 따라 오르자 곳곳에 알맹이가 빠진 밤송이가 보였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오르기엔 가파르고 거친 이 산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밤농가라는 것을 곳곳에 붙은 ‘농사 중’이라는 팻말로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론 이곳에서 밤농사를 짓지 못할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리니 껍질만 남은 밤송이 마냥 마음이 허했습니다. 밤농사를 위해서는 항공방제를 해야만 하는데 송전탑이 세워지면 공중에서 약제 살포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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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경찰과 대치 중인 희망버스 기획단과 일행

우리는 1시간 가량 산을 타고 내려왔는데, 몸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에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송전탑 건설현장으로 가려면 산을 하나 더 올라야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어두워지면 경찰과의 충돌에서 산비탈로 굴러 떨어지는 위험이 따른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따라 내려가려는 찰나 경찰 한 명, 두 명씩 우리를 비집고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두 무리가 되어 길 양편에 빼곡히 들어섰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거친 몸싸움이 있었습니다. 말도 없이 달려드는 건장한 남성들 탓에 의도치 않게 한바탕 몸싸움을 벌이고 그 사이에 둘러싸이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느꼈을 몸과 마음의 위축이 제게도 찾아왔습니다.

경찰은 ‘공사 방해 금지 가처분’을 신청하여 송전탑 건설 현장 인근에 주민들 통행을 제한하고 오가지 못하도록 고착을 시킵니다. 경찰관직무집행법 6조 1항에 따라 범죄 행위를 예방하기 위해 그 행위를 제지하는 것입니다. 경찰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주민들이 적법한 공사현장에서 업무를 방해할 위험이 높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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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역 앞에서 촛불을 들고 집회에 참여 중인 나와 일행

둘째 날, 우리는 산외면 용회리 마을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무척이나 조용했습니다. ‘보상은 필요 없다. 우리는 살던 곳에서 살고 싶을 뿐이다.’ 라는 우리의 피켓을 제외하고는 이곳에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어제 저녁에 이어, 마지막 집회장에 가기 위해서 일행과 줄지어 논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조형물이 세워진 곳에 다다르자 희망버스 기획단으로부터 이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고 이치우 할아버님의 논이었으며, 송전탑 건설 예정지로 이치우 할아버님께서는 한전 직원과 대치 중에 분신을 하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술가들은 추모를 위해 조형물을 세웠던 겁니다. 할아버님께서 일구신 논 위를 가로질러 가는데, 이미 잘려져 허옇게 마른 벼의 밑동조차 밟을 수가 없었습니다. 외투 양쪽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두 손도 빼내어 가지런히 모았습니다. 죄송스러웠습니다. 저는 할아버님께서 그토록 지키시려고 하셨던 곳에 너무 늦게 찾아왔고 너무 더디게 추모에 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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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치우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송전탑건설 예정지인 논 위에 올려진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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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치우 열사의 논이었던 곳으로 향하는 우리들

 

마지막 집회장에서 마주 앉아 할머니, 할아버지와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와주어 고맙다고 밀양 땅에 농사꾼의 그 손으로 우리들의 손을 꼭 잡아 주시며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할머니 품에 안기니 너무 늦게 찾아 뵌 죄송스러움과 그 분의 고마움이 느껴져 저도 덩달아 울었습니다. 모두가 서로 안부를 묻고 다시 뵙겠다고 약속을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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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집회장에서 어르신들께 인사 드리는 일행과 (아래)우리를 마주보고 앉으신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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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올라오는 밤길을 버스에서 있었습니다. 창 밖을 보니 밀양과는 참 다르게 가로등이며 간판불빛으로 밝았습니다. 가로등보다 하늘의 별을 찾기가 쉬웠던 밀양의 깊은 밤이 그리워졌습니다. 밀양이란 그 땅에 내린 어떤 뿌리도 765kV 고압전류를 양분삼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니, 오직 밀양 그 흙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들이 안쓰러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산, 나무, 땅과 더불어 노년을 보내고자 하시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굽어진 등허리에 무겁디 무거운 짐이 지워져야만 하는지 참 이 세상이 야속했습니다.

그간 내 최대의 실패는

내가 남이 되어본 적이 없다는 것

죽어라고

나는 나만이었다는 것

위에 시는 고은 시인의 [무제]의 일부입니다. 밀양에 내려가기 몇 일 전부터 손에 쥐고 있었는데, 다녀온 뒤로 저 시를 읊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간 저의 기준으로만 권리보유자와 이 운동을 이해하려고 했던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밀양 뒷산에서 밤송이를 찔러보고 내려와서 경찰과의 몸싸움, 산 아래에서 송전탑공사현장을 무력하게 올려다보며, 잠시나마 나는 박나희가 아닌 상동면 여수마을에 할머니였습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논문,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던 불과 몇 일 전에 나를 떠올려 보니, 시처럼 그간 내 인생 최대의 실패는 내가 남이 되어본 적이 없다는 것 죽어라고 나는 나만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국제앰네스티에서 모금전문가로서 성장하는 것이 목표이고 꿈인 저에게 밀양에서의 깨어짐은 서른 언저리에서 새로운 나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A4용지 한 장에서 벗어나 권리보유자와 후원회원, 지지자가 진정으로 만날 수 있도록 타인의 고통에 나의 마음을 덧대어 아파할 줄 아는, 죽어라고 나는 남이 되고 싶습니다.

중국: 굴리게이나를 석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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