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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이 있다 : 영화 ‘두 개의 문’

* 이 글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소식지 <Amnesty Magazine> 2012년 003호 ‘문화공간’에 실린 글로서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Amnesty International

두 개의 표현. ‘수구꼴통’과 ‘좌빨좀비’. 줄여서, ‘수꼴’과 ‘좌좀’


언젠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정치적 목적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입 받아온 옛 세대들이 물러나고 보다 넓은 세상과 다양한 가치관을 접하며 성장한 젊은 세대들이 나이가 들어 시민사회의 주류를 형성한다면, 비틀리고 왜곡된 이 나라의 정치 스펙트럼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정부에 비판적이거나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한다고 빨갱이 소리를 듣고, 애국과 자유라는 허울 좋은 명분 뒤에 숨어서 폭언을 일삼거나 가스통에 불 붙인 채 교양 없는 행동을 벌이는 이들을 보수단체라고 애둘러 점잖게 표현해주는 몰상식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 얼마나 순진한 발상이었던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와 ‘페이스타임(화상통화)’을 하고 ‘카톡’을 할 수 있는 이 첨단의 시대에도, 여전히 한국인들의 ‘타임라인’에는 ‘수꼴’이나 ‘좌좀’이라는 표현이 범람하고 있다. 이제 세계가 지구와 공존하기 위해 환경과 생태를 이야기하고, 기술과 문화의 융합으로 지식과 정보 공유의 혁명이 일어나며, 끝없는 성장과 개발 대신 인간 행복과 복지를 고민하고 우주로 우주로 나아가는 이런 시대에, 아직도 한반도만이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낡은 이데올로기 싸움과 사상검증 등의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굳이 편을 들어주고 싶지 않은 이 싸움에, 그러나 예전부터 신경에 거슬렸던 중요한 것 한가지는, ‘꼴통’과 ‘좀비’의 차이다. ‘언어’가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고 표현 그 자체로서 생각과 행동을 바꿀 수도 있는 힘을 가진다는 지점에 동의한다면, 꼴통과 좀비의 차이는 극명하다. 최소한 꼴통은 사람이고, 좀비는 사람이 아니다. 말장난 같지만, 이 차이는 의외로 중요하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혹자들은 ‘촛불좀비’라는 말을 쓴다. 촛불집회에 나선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는 표현이다. 좀비들은 죄다 물대포와 곤봉으로 때려잡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좀비영화가 장르영화로서 가지는 함의가 ‘극도로 물화된 자본주의에 매몰된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성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좀비들은 시골 대신 도시를, 일반 상점 대신 대형마트를 헤매인다.) 한국의 ‘좀비’들은 대신 시청 광장에, 용산에, 평택에 있다. 다른 의견, 다른 생각을 요구하는 자들을 오로지 ‘무관용’의 무력으로 진압해버리는 상황이 좀비에 다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은 세간의 예상처럼 일방적으로 철거민의 편을 들지는 않는다. 영화는 법정 녹취록과 참사 당일의 현장 영상, 경찰의 채증 영상 등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마주하는 불편한 진실 중의 하나는, 그날 생지옥을 방불케하는 참사의 현장에서 경찰 또한 피해자였다는 점이다. 농성을 시작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충분한 사전준비도 없이 경찰특공대 투입이 결정된 것은 누가 봐도 당시 경찰청장 내정자였던 김석기의 청와대를 향한 과잉충성의 정황이 확실하다. 한겨울 어둠 속, 살을 에는 강추위에, 물대포가 뿌려지고, 화염병과 진압장비가 맞부딪치는 그 전쟁과도 같은 아비규환 속에 ‘사람 대접’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과 사람들을 그런 극한의 상황 속으로 내던진 자체가 이미 심각한 폭력이다. ‘진압대상’으로 규정된 철거민들도, 전경들도, 심지어 경찰특공대도 거기선 사람일 수 없다. 권력의 도구로서 인간성을 상실한 채 기능할 뿐인 진압장비였을 뿐.

그 상황에 상처받지 않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서 그저 명령만 내리는 ‘윗선’ 몇 뿐인 것을. 만약 마치 어느 동화 속 이야기처럼, 대통령이, 서울시장이, 경찰청장이, 하다못해 경찰서장이 말 한마디 건네보기 위해 빈 몸으로 철거민들을 찾았더라면. 그랬더라도, 그들이 화염병을 던질 수 있었을까. 대테러진압이 본래 목적인 경찰특공대를 콘테이너에 태워 올려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6명의 생명이 스러지고, 남은 이들이 평생 고통을 품은 채 살아갈 필요가 있었을까.

그로부터 3년 반이 지난 지금도, 참사의 책임을 모두 철거민에게 돌려서 구속하고, 부상자들의 건강보험료를 인정하지 않고 청구하는 등의 피를 말리는 방법으로 남은 이들에 대한 탄압은 계속 되고 있다.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날 현장에 있었던 경찰들도 심한 정신적 내상을 입었을 것이란 게 용산참사를 바라보는 시선 중의 하나다. 그날 작전에 투입된 경찰특공대 2제대장의 법정 진술이 오래도록 메아리처럼 귓가에 남는다.

“희생된 철거민도, 경찰 동료도, 모두 사랑하는 우리 국민입니다.”

 


위정자들은 시시때때로 국민의 이름으로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많은 일을 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위한다는 국민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광장에, 평택에, 대한문 앞에, 용산에 있는 이들이 국민이 아니라면 누가 국민이란 말인가.

그들 모두가 개개의 가능성을 가진 존엄한 개인이고 시민이다. 진압하고, 명령하고, 때리고, 무시하고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날 화염 속에서 숨져간 그 모든 넋도, 살아남아 아픔을 기억해야만 하는 업을 진 이들도, 모두가 같은 사람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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