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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모든 것을 알아내겠다 : 영화 ‘타인의 삶’ 리뷰

* 이 글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소식지 <Amnesty Magazine> 2012년 002호 ‘문화공간’에 실린 글로서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 Amnesty International

민간인 불법사찰이라는 망령이 되살아났다. 천연두처럼 벌써 오래 전에 이 땅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야만적인 범죄행위가 21세기에 접어든 지 10년이 훌쩍 지난 이 시대에 국가기관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더욱 개탄스러운 건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위협을 마치 선거 이슈의 하나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일부의 뒤틀린 시선이다. 진영의 논리를 넘어 시민에 대한 불법적인 사찰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악질적인 범죄라는 인식의 공유가 절실하다. 포털 사이트의 영화 섹션에 묻혀 있던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을 어렵사리 찾아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 독일민주공화국(동독) 당국은 10만 명에 이르는 악명 높은 비밀경찰 슈타지(Stasi) 요원과 20여만 명의 정보원을 동원하여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을 목표로 시민들을 도청하고 감시하고 미행했다.

슈타지 간부인 비즐러는 섬약한 외모와는 달리 체제와 조국에 대한 강철 같은 신념을 지닌 냉혈한이다. 걸려든 먹이는 결코 놓치지 않는 현장요원이었던 그는 지금 슈타지 아카데미에서 미래의 요원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교수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자신의 아카데미 동기이며 조직의 수장인 동료의 요청으로 오랜만에 현장으로 돌아간다.

훈장을 받을 만큼 체제에 헌신적이고 재능 있는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여자친구이자 배우인 크리스타를 감시하라는 임무였다. 집안 곳곳에 설치해놓은 도청장치로 두 사람의 사생활을 24시간 속속들이 감시하던 비즐러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감시하는 커플에게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다. 관음증적인 도청자에서 두 예술가가 집안에서 만들어내는 연극의 충실한 관객이 된 비즐러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보호하기에 이른다.

2007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과거 동독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된 민간인 사찰을 배경으로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 사이에 벌어지는 상호작용을 섬세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전형적인 사회고발 영화의 외형을 띠고 있지만 작은 모니터 화면 속으로 빨려들게 할 만큼 영화적인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감시자인 주인공을 도식적이고 진부하게 그리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그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미덕도 있다. 엔딩의 소소한 반전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다운로드에 필요한 천 원짜리 한 장으로 이런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건(게다가 소장까지 가능하다니!) 시쳇말로 ‘대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얼굴들이 있었다. 내가 직접 목격했던 이 땅의 비즐러들이다. 80년대 우리네 대학 캠퍼스에는 이른바 프락치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프락치란 당시 보안사나 안기부, 경찰이 운용했던 비밀사찰요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대개는 학생으로 위장했지만 진짜 학생들을 포섭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대학 신입생 때 살았던 기숙사 옆방에도 프락치가 있었다. 학생운동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대학원생 선배를 감시하기 위한 요원이었다. 다행히 그 선배가 안기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프락치의 존재와 신원을 확인했기에 늘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몇 년 뒤 다른 캠퍼스의 시위 현장에서 무전기를 들고 진압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그와 우연히 마주쳤다. 어색한 미소로 내 시선을 피하던 섬뜩한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 다른 비즐러와는 최근에 결별을 했다. 역시 학창시절, 동료와 선배들이 입을 모아 프락치라 지목했던 선배가 있었다. 남다른 역경을 딛고 검정고시를 통해 뒤늦게 대학에 입학한 그 선배에게 덧씌운 혐의를 나는 애써 무시했고 그를 변호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십 몇 년 동안 좋은 선후배로 인연을 이어왔다. 지난 달 오랜만에 만난 호프집에서 생맥주로 얼근해진 다음, 오랫동안 속으로만 묵혀온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형이 정말 프락치였냐고. 놀랍게도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더욱 놀라운 건 그것에 대한 일말의 가책도 없는 그이의 태도였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며. 그날 밤 다시는 보지 말자며 돌아서는 발길이 한없이 무거웠다.

옆에 있는 누군가가 나와 동료들의 뒤를 캐는 프락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시도 거둘 수 없었던 불행한 시대의 그림자가 데자뷰로 떠오르는 요즘, 정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백신처럼 봐야 할 영화가 <타인의 삶>인 듯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 이송원 도서출판 페이퍼로드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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