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인터뷰

같은 인간이다 – 인권연구자 조효제 교수

* 이 글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회원소식지 <Amnesty Magazine> 2012년 002호 ‘앰네스티가 만난 사람’에 실린 글로서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 Amnesty International 

 

인권이란 무엇인가? 왜 모든 인간은 평등한가? 누군가 불쑥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만은 없는 질문입니다. 더군다나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이야기 되는 ‘인권’은 대중들에게 더욱 낯설고 먼 개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조효제 교수는 이 막연한 인권을 대중의 품으로, 청소년의 품으로, 끌고 들어온 인권연구자입니다. 경제ㆍ사회적인 국내외 환경이 급변하면서, 인권에 대한 이슈와 의제 또한 폭넓게 확장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방향과 고민을 함께 하기 위해 조효제 교수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효제 교수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비교사회학을,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0년대 앰네스티에서 활동을 시작, 이후 한국조절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한국지부 재건을 이끌었다.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조사과 연구위원,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준비기획단 위원, 법무부 정책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하버드 대학 로스쿨 인권 펠로와 베를린자유대학 초빙교수를 지냈다. 현재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하 앰) : 오늘 크게 세 부분으로 인터뷰를 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로는 세계인권 동향에 대해서, 두 번째는 한국의 인권상황, 세 번째는 앰네스티 한국지부에 대해서 입니다.

먼저 세계인권동향을 보면, ‘아랍의 봄’을 보면 좀 기대가 되기도 하고, 유럽에서 나타나는 인종주의를 보면 걱정되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전세계 인권의 흐름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 기대할 것과 우려할 것은 뭐가 있을까요.

조효제 교수 (이하 조) : 일반적인 의미에서 세계는 진보하고 있다고 봅니다. 스티븐 핑커라는 심리학자가 근대에 들어와서 폭력성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줄어났는지 쭉 연구를 해왔습니다. 전체적인 패러다임이 ‘폭력을 당연시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거부감이 적었던’ 시기에 비해서 폭력성에 대한 경각심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물론 전쟁이나 학살처럼 갈등이나 일탈적인 사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크게 봐서는 폭력적인 행동이 줄어들고, 특히 대중의 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늘어났습니다. ”인간 사이의, 그리고 국가 사이의 일은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다.” 이 말이 지금은 상식적이지만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있기 전 시대만 해도 A나라 왕이 B나라의 영토를 침범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정복 권리’라는 개념까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능한 왕으로 취급됐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고민했던 것도 영토확장이 무엇이 문제인가였죠.

아직도 여러 가지 폭력적이고 잔인한 일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것을 규범적 차원에서 ‘잘못된 것’이라 보는 의식 자체가 진보된 거죠. 그렇게 봤을 때 폭력성을 용인하는 관점 자체가 굉장히 변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국제적인 차원에서나, 특히 냉전종식 이후 기본적으로 평화적인 문제해결이 옳다고 여기는 규범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대국들에게 책임을 묻고 있기도 하고요. 규범적 차원에서의 변화를 우리가 실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공기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이러한 것들을 당연시 여기지만 바뀐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까지는 긍정적인 이야기입니다.

실제로는 여러 가지 문제도 많죠. 전세계적으로 빈부격차가 늘어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국민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던 노동의 문제가 악화되면서 벌어지는 노동유연화 현상, 비정규직 등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죠. 산업사회의 근본을 이루던 전제들이 다 무너지고 있고 사람들이 힘들어 합니다. 다들 어렵고, 졸업하고 나면 뭐할지, 파트타임과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또한 세계화의 부산물로서 사람들의 이동이 비교적 많아졌습니다. 이주자가 늘어나고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살게 되면서, 이것을 관리하기 위해서 다문화주의가 나오고 통합이론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문화주의는 통합이론입니다. 오해하기 쉬운 것이, ’다문화’가 모든 걸 다 허용해준다고 생각하는데, 하나의 국가라는 정치공동체를 그대로 갖고 있기 위해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소수집단에게 최대한 자율성을 부여해주는 게 좋다는 거죠. 즉, ‘통합하기 위해서 풀어주자’ 라는 거죠. 고도의 통합이론입니다. 분리독립주의가 아닙니다. 다문화주의로 풀어보려고 하지만 이슬람과 유태계의 갈등이나 노르웨이의 총기난사 사건처럼 다문화에서 일어나는 민족갈등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제국주의로부터 제대로 된 탈식민을 이뤄내지 못한 아프리카의 문제도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말리아, 남수단을 들 수 있겠지요. 농담으로 말해 남수단은 두 남자가 만든 나라에요. 조지 클루니와 반기문! 그러나 또 싸우지 않습니까? 과거의 종족 분포를 무시하고 강대국들의 일방적인 선긋기로 독립시켜봤자 계속 싸우는 겁니다. 종족적 내셔널리즘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거죠. 우리가 요즘은 다문화주의와 코스모폴리탄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내셔널리즘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 문제의 본질 적 해결 없이 갈등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정치적으로 얘기를 했습니다만, 지구 환경변화로 인한 자연현상으로 인간에게 직접적인 인권침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그로 인한 이주 같은 것들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우기 때는 모든 사람들이 ‘물 속에서 산다’고 합니다. 자연기후 변화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식량 문제입니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전세계에서 인구가 70억이라 했을 때, 이번 가을에 수확하기 전까지 우리 인구가 먹을 수 있는 총 식량이 얼마나 남았냐 보니 52일분 밖에 없다고 합니다. 간당간당한 수치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정도가 남아있어도 그것은 평균치이기 때문에, ‘없는 사람들’은 바로 죽고, ‘있는 사람들’은 10년, 50년 더 살 거라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빈부격차나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계층화가 기후, 환경 등에 전부 얽혀서 문제를 더 복잡하게 꼬이게 만듭니다. 지금까지는 인권 법, 인권 조직, UN 등 제도적으로 접근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구조적으로, 사상적으로, 심리적으로도 접근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인간의 잔혹성이나 폭력성에 대한 인식은 굉장히 높아졌는데, 이것은 인간 인식의 진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은 문제가 남아있고 새로운 문제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인권문제로 보는 것 자체가 우리의 높아진 안목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앰 : 아까 다문화주의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듯이 세계화와도 관계가 있겠지만, 세상이 자꾸만 사람들에게 ‘네 이웃을 증오하라’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세계화 이전에는 증오의 대상이 되는 ‘다른’ 사람들이 안 보였잖아요. 저는 벨기에에서 히잡 문제가 단 한 표의 반대표도 없이 통과됐다는 것, 또 ‘세상의 천국’이던 스위스에서 이슬람 첨탑을 세우는 게 문제가 된 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요. 코소보 사태나 이런 것들도 결국은 같이 살던 이웃들이 적으로 돌변하고, 국가 차원의 문제가 아닌,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에 대한 매일매일 현실적인 생활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은 기존의 인권운동의 틀로는 해결이 어려운데,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요.

 

: 최근에 인권과 관련하여 사회심리학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주로 법학이나 국제정치, 아니면 사회학에서 했는데 요즘은 심리학에서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모든 인권침해에 뿌리가 되는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딱 떨어지는 해법은 없지만, 한 가지 소개해 드리자면, 교육으로 감수성을 제고시키는 롤플레이(역할극). 또 하나는 같이 접촉을 늘리는 겁니다. 공격적 성향이 많은 그룹들을 중립적인 상황에 집어넣고 어떤 걸 놓고 싸울 필요가 없이 같이 지내게 해보는 거에요. 사실 싸운다는 거도 ‘쟤네 때문에 우리가 뺏기네’ 라고 생각하니까 생기는 겁니다. 아무 이해관계가 없으면,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단순히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싸우고 죽이지는 않습니다. 결국 차이점이나 정체성에 따른 증오나 공격성의 밑바닥에는 어떤 식이든지 이해관계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없는 상황에 두 그룹을 넣어 놓고 함께 지내게 하는 겁니다. 그런 실험이 끝나고 나면 ‘쟤네도 우리랑 똑같네?’ 라고 사람들이 배운다는 거죠. 지금까지 저 사람들을 미워했던 게, 경제적 사회적 상황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하는 방식입니다. 또 하나는 협동적인 일을 같이 시키는 겁니다. 유명한 실험으로, 구분이 없는 한 반의 학생들을 랜덤으로 두 팀으로 나눠서 축구 경기를 시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짝이었는데, 두 팀으로 나눠서 경기를 시키니까, 상대팀에 대한 증오심이 갑자기 늘어납니다. 그와 반대로, 연구자가 우물에다가 일부러 뭔가를 떨어뜨리고, 이것을 꺼내려면 다 함께 동아줄을 당겨서 일해야 된다라는 상황을 설정하여 두 팀을 같이 일하게 했더니 서로 미워하던 애들이 같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일하더랍니다.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도 원래 악한 존재도 아닙니다. 만들어집니다. 사회정치적인 구조를 만드는 지도자로서 이걸 잘하면 좋은 지도자고, 잘못하면 선동자가 되는 거죠. 후자는 이런 ‘us and them’ 프레임을 통해 상대방을 싸워야 되는 상대로 생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앰 :  2008년도에 앰네스티 ISP 위원회에서 다가오는 미래에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인권의 도전이 뭐냐’하고 토론했더니, 놀랍게도 빈곤하고 지구온난화가 나왔습니다. 그전 앰네스티 분위기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만큼 인권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도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반영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기존의 제도와 법, 이런 것 중심으로 가는 것으로는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후문제, 식량문제 등 우리가 직면하는 새로운 문제들에 있어서 인권의 역할 또는 인권이 가져야 할 새로운 모습은 어떤 걸까요?

 

: 인권으로 봐야 하는 새로운 상황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인권이 가지고 있던 이론, 제도적 차원으로는 현재 새롭게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감당하기 어려워요. 인권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이론적 제도적 차원이란 이런 것입니다. A라는 권리의 소유자가 B라는 의무의 담당자에게 어떠한 근거를 들어서, ‘이것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청구권이 Rights 개념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권리가 없다”라고 말하는데요, 처음부터 인권은 공동체 개념이고, 두 명 이상 이뤄진 사회에서 가능한 개념입니다. 권리는 명확한 의무의 담당자를 지정할 수 있는 개념인 것이죠. 이게 Citizenship 개념과 같이 나온 것입니다. 한 국민으로서 세금을 내고, 국가에게 요구를 합니다. 나의 인신, 보호, 자유를 보장해달라는 거죠. 일종의 대응적인 구성이었는데, 이것이 새로운 상황,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 등과 맞붙게 된 겁니다. 전지구적으로 지구온난화의 책임을 누구한테 지울 것이냐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가해자이자 피해자입니다. ‘의무를 가진 대상’을 특정하기 어렵게 된 거에요. 촛불집회 때도, 학생들에게 광우병이 누구의 책임이냐고 물었습니다. 부시의 책임인지, 대규모 공장식 축산업의 책임인지. 사실은 글로벌 식량체계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존의 인권담론이 가지고 있던 개념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은 많이 미흡합니다. 무능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러면 과연 인간의 과거형태, 권리와 의무의 대상자가 명확하게 특정하는 이 형태를 버리지 못하더라도 이것을 훨씬 넓혀서 정치의 개념자체를 확장시키는 것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니냐는 거죠. 이렇게 되면 인권 자체가 정치인 겁니다. 일반적인 정치과정이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인권운동은 정치운동인 것이죠. ‘코너 기어티’라는 법학자가 말하길, “인권에 커밍아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Coming-out of Human rights.” 사실 따지고 보면 세계인권선언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적 요소가 같이 들어있는 것이고, 그게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어서 나타났던 형태는 북유럽식 복지국가라는 겁니다. 인권이 가지는 불편부당성의 원칙 때문에 이야기를 못했지만, 실은 인권이 사회민주주의 정치운동이라는걸 솔직히 인정하자는 겁니다.

상당한 논쟁의 소지가 있는 말이지만, 쉽게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세계인권사상이 자유주의라고 하는 보편담론과 사회주의의 보편담론이 휴머니즘이라는 몸통을 중심으로 만난 거다” 라는 주장입니다. 인권의 새는 ‘휴머니즘이라는 몸통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좌우 날개를 가진 것’입니다. 근대의 역사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투쟁이잖아요. 이것을 인권에 하나로 녹여서 같이 가보자, 그런데 1948년에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지자마자 바로 냉전구조가 고착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그게 다시 벌어진 거죠. 그때 만약 냉전이 없었다면, 지금쯤은 많은 부분에서 사회민주적인 일종의 사상의 통합이 상당부분 가능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냉전이 끝나고 90년대부터 다시 발현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1948년의 관점에서 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상적인 결합에서 본 인권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봅니다. 이에 덧붙여서, 분단국가로서 한국이 가지는 특수성 때문에, 그 형태가 통일이 되든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되던 간에 자기결정권이 제대로 행사되는 분단상황의 해소문제가 한국 인권문제의 중요한 한 축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앰 : 마침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국 상황으로 넘어가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근 국내인권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있지만, 외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시민사회의 힘과 역동성에는 다른 의견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조용한 국민들을 가진 바로 옆 일본과 비교해봐도 그렇고요, 08년 촛불시위도 그 예가 될 수 있을 텐데요. 영국과 독일 생활 등을 거치시면서 ‘바깥’에서 발견하게 되는 한국의 인권과 시민사회를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 넓게 봤을 때, 저는 비교적 잘 나가고 있다고 봅니다. 큰 흐름으로 보면 한국의 인권은 향상되고 있어요. 과거 7-80년대 상황에 비교하자면 그때보다 나쁘다고 보기는 어렵죠. 그렇지만 지금 2012년 현 상황에서 인권상황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일단 체감지수가 아닌 겁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현 정부 기간 동안 한상진 교수가 조사한 기본권의 체감지수를 봤는데, 사람들이 느끼는 인권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체감온도와 실제온도가 다르듯이, 한국 인권상황도 그렇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인권을 평가할 때엔 직전의 상태를 비교 기준으로 삼습니다. 70~80년대와 비교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이는 인권에 대한 기대치와 의식이 많이 올라간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서 50년 전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날라왔다고 치면 지금 상황은 굉장히 발전한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많은 문제를 겪어왔고, 역사가 진보하고 발전하면서 여기저기서 허점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민주화 이후에 기본적인 문제들은 이미 다 해결된 줄 알았는데 아직도 허점이 보이니 큰일났다고 느끼는 거죠.

 

앰 : 머리로 생각하면 나아졌지만 감정적으로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특히 불법사찰의 경우 굉장히 심각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 현 정부 하에서 인권문제에 있어 심각하게 여러 면에서 퇴보를 보였는데, 그 중에서 체감지수뿐만 아니라 절대지수에서 실제로 몇 분야가 나빠졌다고 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불법사찰입니다. 저는 현 정부가 가지고 있는 인권 의식 자체가 상대평가에 익숙한 ‘비즈니스 마인드’라고 봅니다. 이런 컨셉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문제의 심각성을 못 느낄 겁니다. 불법사찰 문제가 터졌을 때 “80%는 이전 정부의 행동이다” 라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나쁜 의미에서의 실용 정부다운 천박한 대답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양으로 따지는 겁니다. 80%가 그 전 정부의 행적이니 자기들은 20%를 해도 괜찮다는 거죠. 하지만 탈법, 범법은 1%만 했더라도 잘못인 거죠. 국정을 담당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준법인식 자체가 없다고 봅니다. 한국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현 정부당국과 공권력은 “우리가 어때서? 오바마가 칭찬한 나라다”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어요. 이런 논리는 성적으로 치면 ‘너 몇 등이야?’를 묻는 상대평가의 논리입니다. 그 점에서 저는 앰네스티가 굉장히 수준이 높다고 봅니다. 프리덤하우스에서는 전세계 국가를 몇 등 몇 등, 한 줄로 순위를 정해 줄을 세우지만 앰네스티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인권의 선진국인) 스웨덴도 개선해야 할 문제가 많은 거죠. 절대평가 방식입니다. 인권을 상대적으로 혹은 절대적으로 평가해야 하느냐, 저는 절대평가가 맞다고 봅니다. 인권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진보해야 하고, 어느 나라든지 그 기준으로 보아 모자라면 비판 받아야 합니다. 한국에서 인권에 대해서 자꾸 옛날과 비교하면서 ‘우리가 이만하면 괜찮지’ 라고 하는 정부는 인권에 무지한 공권력인 겁니다.

 

앰 : 저는 인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강의를 할 때, 인권의 근거를 얘기하는 부분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인권의 근거를 여러분이 묻는다면 저는 없다고 밖에 대답을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이 동등하고 존엄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개념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논쟁을 통해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저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얼마 전 성고문에 참여했던 한 의사는 재판과정에서 “나는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라고 얘기했었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인권사회학에 어떤 역할을 기대할 수 있고, 인권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의 꿈과 목표는 무엇인가요?

 

: 불법사찰을 당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사찰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합니다. 엄청난 사회심리학적 상처를 입은 거지요. 이런 정신적, 심리적인 상처들을 치유하고 상담하는 정혜신[1]  박사처럼, 사회적인, 법적인 차원을 넘어선 넓은 의미에서의 인권을 보고자 합니다. 이런 쪽의 공부가 앞으로 더 늘어나야 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인권에 대해 무지하면, 자기가 한 짓에 대해서 인권침해라고 해석이 되질 않습니다. 학교폭력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요. 애들이 말하길 “장난으로 그런건데 그렇게 될 지 몰랐어요” 라고 말하잖아요. 똑같은 현상을 우리는 객관적으로 이 현상을 인권침해다 라고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고 가정하면 안돼요. 모든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폭력의 정의 자체도 다르고, 상황을 이해하는 틀 자체가 다릅니다. 이런 상황을 선 구조화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선생님이 제게 면담을 신청하셨는데,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진짜 진지하게 질문을 한다 합니다. 장애학생을 어떻게 똑같은 인간으로 볼 수 있는지, 각종 복지가 왜 돈 낭비가 아닌지, 왜 우리 돈으로 다른 사람들을 먹여 살려주어야 하는지 선생님에게 진지하게 묻는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조차도 모릅니다. ‘같은 인간이다’ 라는 기본전제부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인권사회학이 해야 할 몫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모든 인간을 똑같이 보고 있느냐? 아니거든요.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인간은 다 같은 인간이다’ 라고 생각할 거라고 전제를 하면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인권의 대한 개념 자체가 없거나 공리주의가 가득 차있습니다. 기본적인 인간평등과 ‘모든 인간은 같은 존재들이다’ 라고 하는 인권적 개념을 무개념과 공리주의를 밀어내고 머리 속에 집어 넣어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인권담론이 인간을 바꾸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이건 인권운동이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앰 : 한국지부가 40주년을 맞았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한국 인권이론의 기반을 제공해주신 분, 전진을 선도하는 분으로 사회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속을 캐보면 앰네스티 활동가 출신이시잖아요? 한국지부 40년 역사 중간 허리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한국지부가 있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한 분들 중에 하나이고, 한국 사회 내에서 한국지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조언을 주신다면.

 

조 : 피터 베네슨 선생님을 90년과 94년에 두 번 뵈었습니다. 이 분이 했던 말이 “늘 항상 어떤 사회든 완벽한 사회가 없다. 아주 작은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작은 불합리한 점, 작은 불이익 이런 것을 항상 새로운 눈으로 ‘왜 저래야 하지’라는 의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 분이 포르투갈에서 자유를 위한 건배 때문에 체포된 학생 기사를 읽고는 ‘왜’라는 생각을 한 거잖아요. 아직도 그 말씀이 생생합니다. 앰네스티가 그런 의미에서는 아주 굉장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불의에 대한 민감성, 초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는 모든 인권운동은 로컬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봅니다. 아주 작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불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국제적 차원의 불의에 대해서도 같이 항의하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피터 베네슨 선생도 그 조그마한 작은 기사, 남들은 다 지나치는 작은 기사에 분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읽었지만 피터 베넨슨이 주목한 것만 운동으로 남게 된 거죠. 작은 거지만, ‘왜 그래야 해?’라는 질문. 감성이 있는 거죠. 국제인권단체일수록 공허한 국제담론에만 의존하면 안 됩니다. 국제인권담론일수록 로컬 감수성에 뿌리를 둬야 합니다. 작고 개인적인 것부터 인권과 연결시키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북한 문제를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봅니다. 옛날부터 한국 전통적인 주류 인권운동의 맹점 중 하나가 북한인권문제를 외면하려고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는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관점에서 안고 가야 합니다. 진정한 인권운동가들,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고 과거에 인권운동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온 진정성과 전통성이 있는 인권운동, 진보적 인권운동이 북한 인권문제를 다뤄야 문제가 제대로 풀릴 수 있습니다. 진정성도, 전통도 민주화에 대한 기여도 없는 이상한 세력이 북한 문제를 다룰수록 정치화만 될 뿐이고, 북한인권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봅니다. 이 부분을 공백으로 만들어놓은 한국 인권운동은 성찰해야 합니다.

 

앰 : 한국지부 40년이 됐는데, 그 중의 4분의 3을 같이 하셨고, 국제앰네스티 50년 역사에서도 반 넘게 같이 하셨습니다. 앰네스티가 교수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요.

 

: 제 세계관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앰네스티가 ‘보편성에 입각한 인권운동’이란 점에서 시민운동과 세계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보편성’은 인간, 인류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보면서 출발하는데, 프랑스 혁명 이래에 자유 평등 우애라는 진보의 기본적 담론에 가장 적합한 형태라고 봅니다. 제가 나이 들면서 초기의 순진한 보편성 관념에 대한 환상을 많이 버렸지만 여전히 앰네스티는 제가 인권문제를 보는 관점을 제공해 줬으며, 저의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습니다. 앰네스티를 저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1] 심리분석과 치유전문가로서 널리 알려진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와 고은태 위원과의 대담 <불안한 시대로부터의 탈출방법>을 앰네스티 소식지 2011년 002호에서 다룬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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