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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일, 이제는 죽음의 밧줄 위에도 생명의 꽃이 피어나려고 한다.

100일, 500일, 1,000일.. 사람들은 기념일을 통해서 사건이나 관계의 의미를 되새기곤 합니다. 연인들은 자신들의 만남을 축하하며 선물을 교환하기도 하고 단체와 기관들은 성대한 창립기념행사를 개최하면서 축제의 장을 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지난 9월 8일은 조금 이색적인 기념일이었습니다. 바로 한국에서 사형집행이 중단된 지 5,000일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거든요. 사형집행중단 5,000일, 사실 기념일이긴 기념일인데 막상 뭘 기념해야 하는지 잘 감이 안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날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비상했습니다. 영국 외교부 제레미 브라운 차관은 13일에 성명을 내고 “한국이 9월 8일로 사형집행중단 5,000일이 된 것을 환영한다”면서 입법을 통한 완전한 사형폐지를 촉구했습니다. 호주 의회도 93명의 의원들이 목소리를 모아서 우리 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에 서한을 보내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며 사형폐지특별법안을 조속히 처리해달라고 촉구했습니다. 이외에도 홍콩 의회, 빌 리처드슨 전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 국제사형반대위원회, 사형반대아시아네트워크 등의 축하의 메시지가 연이어 전달되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이번 기념일에 높은 관심을 보인 것은 한국이 사형집행중단 5,000일을 맞는 것이 한국이 완전한 사형폐지(법률적 사형폐지)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97년 이래로 3차례 정권이 교체되는 동안 단 한 건의 사형집행도 없었던 한국은 이미 지난 2007년 12월 30일부로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어왔습니다. 꽤 오랜 시간 사형집행중단의 기록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이제 곧 법률적으로 사형을 폐지하고 아시아에서 사형폐지운동을 이끌어갈 것이란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국제앰네스티 미국지부 포스터,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사람, 손?”>

이러한 생각을 무리한 억측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은 지난 수십 년간의 역사만 들여다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형집행이 10여년 이상 중단 된 국가는 사형집행을 재개하는 대신 아예 법률에서 사형제도를 없애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그 사회 구성원들이 사형제도 없이도 사회가 정상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사형집행이 있던 1997년을 기준으로 보면, 당시 27개의 ‘사실상 사형폐지국’ 중 오늘날까지 사형집행을 재개한 기록이 있는 국가는 필리핀 하나뿐이며, 그나마 필리핀도 2006년에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해 지금은 법률상 사형폐지국입니다.

내친김에 통계를 들춰보면, 2011년 9월 현재 전세계 197개 국가 중 사형제도를 존치하고 있는 국가는 단 58개국에 불과하며, 그 중에서도 작년에 실제로 사형을 집행한 국가는 23개국뿐이었습니다. 이제 국제사회는 점차 사형제도가 사회를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환상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사형제도의 범죄억제효과에 관해서는 그 동안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사형이 다른 형벌에 비해서 더 큰 범죄억제력이 있다는 신뢰할만한 증거가 드러난 적은 없습니다. 1988년과 1992년, 유엔의 의뢰를 받아 이 주제에 대해 포괄적인 연구를 수행한 영국의 로저 후드 교수는 그의 저서 The Death Penalty: a Worldwide Perspective(2008년 4판 발행, Oxford 출판사)에서 “사형제도의 사형이 종신형이라는 가벼운 형보다 살인을 예방하는 효과가 크다는 가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른다.”라고 밝혔습니다. 2010년 유엔 총회가 2007, 2008년에 이어 3번째로 사형집행 모라토리엄 결의를 채택하며 ‘사형에 범죄억제력이 있다는 결정적 증거가 없다는 점을 확신한다’고 밝힌 것도 바로 이런 연구결과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영화 “집행자” 중 한 장면. 사형은 어떤 말로 정당화하더라도 결국 철저한 계획살인에 불과합니다. >

사형제도가 살인과 같은 범죄를 억제하는데 큰 효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형은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들, 타인의 생명을 무참히 빼앗은 이들에게까지 인권타령을 해야 되겠냐고 따지듯 묻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같은 살인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살인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형은 어떤 말로 정당화하더라도 결국 철저한 계획살인일 뿐입니다. 사형은 우리가 단죄하는 바로 그 행위를 사법정의의 미명 하에 되풀이하도록 하는 반인권적 형벌입니다.

사형제도의 존폐 문제는 단지 사형수 몇 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생명의 존엄성에 두는 가치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법이 사형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이상 우리사회에서 생명권은 법에 의해서 박탈 될 수도 있는 ‘상대적인 권리’일 뿐입니다.

지난 해 2월, 우리와 같은 ‘사실상 사형폐지국’이던 가봉의 의회는 오랜 고민 끝에 자국 법률에서 사형을 폐지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 국회에도 지금 사형폐지에 관한 특별법안이 3개나 발의되어 있습니다. 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나라로 남을 것인가, 법으로 생명의 가치를 수호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우리가 택해야 하는 답안지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오랜 시간 사형집행이 멈추어진 그 교수대에 매여있던 밧줄에는 이제 먼지만 가득 쌓여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 밧줄 위에 죽음 대신 생명의 꽃이 피어나게 해야 할 때입니다.

<사형집행중단 5,000일 기념식 홍보 포스터, 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나라로 남을 것인가, 법으로 생명의 가치를 수호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우리가 택해야 하는 답안지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자메이카: 경찰의 살인을 묵인하지 않고 맞서 싸우다 / 샤켈리아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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