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블로그

42년 전 피자가게에서 떠오른 아이디어, 삶을 구하다

트레이시 울티베이 모에Tracy Ulltveit-Moe, 국제앰네스티 전 브라질·중앙아메리카 조사관

1973년 저는 중남미 담당 인권조사관이었습니다. 당시 브라질은 군부 독재로,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체제 전복’ 혐의로 몰래 잡아 가두고 48시간 동안 체계적으로 고문했습니다.

당시 국제앰네스티의 인권 보호를 위한 활동은 인권 침해 상황을 파악하고,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술적으로 인터넷이나 팩스 등이 발달한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화도 자주 끊기고 우편을 보내는 정도가 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활동하더라도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렸고, 그 동안 브라질 사람들은 고문으로 고통받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무언가 발 빠른 움직임이 필요했습니다.

고민하던 중에 런던의 한 피자가게에서 점심을 먹다가 문득 구금된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구금된 사람이 양심수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일단 행동하자. 전 세계에서 고문 중단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자.’

저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긴급행동Urgent Action‘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AI Urgent Action - Czech human rights activists
1980년 1월에 발행된 긴급행동 사례 소식지.
당시에는 이런 형태로 긴급행동 사례 소식지가 발행되었다. ⓒ Amnesty International그때 마침 브라질의 노동변호사이자 활동가인 상파울루 대학 루이스 바실리오 로시Luis Basilio Rossi 교수가 브라질 보안군에 체포된 후 실종된 상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즉각 첫 긴급행동을 발행하였습니다.

로시 교수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설명하는 사례 소식지지를 만들고 ‘최대한 빨리 행동해주세요. 로시 교수의 행방을 파악하고 목숨을 구하는 데 속도가 중요합니다.’ 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사례 소식지를 수백 장 복사하고 도서관을 뒤져 세계 곳곳의 노동조합과 학술단체 이름과 주소를 알아낸 뒤 바로 우편을 보냈습니다.

그 후 얼마가 지나고, 우리는 로시 교수의 아내인 마리아 호세Maria Jose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브라질 공공안보부인 DOPS 편지지에 쓰인 것으로 로시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면서 자신이 구금된 로시와 만났고, 고문당하지 않았으며 이제 편지를 그만 보내도 된다고 쓰여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편지를 마냥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브라질 정부로 계속 편지를 보냈습니다.

몇 주가 지났을 즈음 마리아로부터 또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의 집에서 보낸 편지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전에 보낸 편지는 남편 행방을 찾으러 다니던 중 DOPS 본부에서 강제로 쓴 편지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DOPS가 처음에는 로시 교수를 구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다 결국 이를 시인했으며, 로시가 고문당한 것은 분명하지만, 로시를 찾는 편지가 속속 도착하자 고문이 멈췄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저를 포함해 아메리카 담당 조사국 사람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춤까지 추면서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멈추지 않았고 계속 편지를 보냈습니다. 마침내 그해 10월 24일, 로시 교수가 석방되었습니다.

Professor Luiz ROSSI
로시 교수. 1996년 상파울루 ⓒ Amnesty International
 

로시 교수가 풀려난 후에도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어떻게 로시 교수가 체포된 소식이 이렇게 빨리 브라질에서 런던까지 올 수 있었을까?’

1987년 브라질 군부독재가 무너질 때까지 우리는 로시 교수에 대한 정보가 어떻게 런던까지 전해졌는지, 1973년 로시 교수가 체포되던 그 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몇 해가 지난 뒤 저와 함께 일하던 매기Maggie가 브라질에서 열린 앰네스티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매기는 그곳에서 브라질 건강전문가네트워크 설립을 주도했다는 한 간호사를 소개받았는데 이름이 마리아였습니다. 매기는 로시 교수의 아내가 간호사였던 것이 기억나 “설마 남편분이 로시 교수인가요?”라고 물었고, 그녀는 로시 교수의 아내였습니다!

마리아의 입을 통해 들은 당시의 상황은 급박했습니다.

1973년 2월 15일 저녁, 마리아와 로시 교수는 집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던 중 브라질 보안군이 문을 부스고 총을 겨누며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로시 교수를 체포하고 가족들이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없도록 전화선마저 끊고, 아무도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했다고 합니다.

절박했던 마리아는 종이에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적은 후 쓰레기처럼 구겨 옆집 담장 너머로 던졌습니다. 종이를 발견한 이웃이 이 사실을 지역 신부님께 알렸고, 이 사실은 대주교 사무실로 전달되었습니다. 당시 진보적인 대주교였던 에르네스토 안스Ernesto Arns는 이를 벨기에의 루뱅Louvain 가톨릭 대학으로 전했고, 그곳에 있던 젊은 신학자들이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국제앰네스티를 우연히 알게 되어 이 내용을 런던으로 전한 것이었습니다.

1996년 긴급행동 시작 22주년을 기념하는 회의가 상파울루에서 열렸고, 저는 20여 년이 지난 후에서야 처음으로 로시 교수와 마리아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트레이시 조사관, 마리아 호세 로시 그리고 로시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96년 상파울루에서 열린 중남미 긴급행동 회의 ⓒ Amnesty International
개인적으로 긴급행동이 인권보호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를 볼 때마다 뿌듯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많이 하는 질문 중에 하나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인권침해 사건들을 매일 보면서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늘 같은 대답을 합니다.

“저는 저의 활동이 사람들의 삶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끊임없이 동기부여가 됩니다.”

아직도 제가 런던의 한 피자가게에서 제안한 긴급행동이 전 세계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여전히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쁩니다. 지난해 600건이 넘는 긴급행동이 발행되었고, 전 세계에서 20만 명이 긴급행동 네트워크로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로시와 연락하지 않은지 수년이 지났지만, 아마도 브라질의 어느 곳에서 42년 전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이뤄낸 것을 기념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긴급행동 네트워크에 한 번도 참여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한 마디를 남깁니다.

“긴급행동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흥미로웠다면, 긴급행동 네트워크에 목소리를 더해 보는 건 어떨까요. 여러분도 누군가의 삶을 구할 수 있습니다!”

 

긴급행동은 이후 국제앰네스티의 주요 활동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지금 까지 수 천 명의 삶을 구했고 고문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권사안에 대해 국제적 우려를 제기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긴급행동’은 실종, 고문 등에 대한 유엔 메커니즘을 포함해 다른 국제기구에서도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현재 300여 명이 함께하고 있으며, 이메일, 팩스, 손편지 등 사례에 따라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기고 글입니다.

번역: 탁민수 자원활동가
편집: 안정아 캠페이너

자메이카: 경찰의 살인을 묵인하지 않고 맞서 싸우다 / 샤켈리아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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