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블로그

영화 <제보자> 엔 있고 현실엔 없는 것

예술의 본질에 대한 가장 오래된 설명 중 하나는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고 흉내낸다는 것입니다. 고전 회화가 그랬고, 지금의 영화에서도 그 증거들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1) 당장 얼마 전 엄청난 관객몰이를 했던 <명량>만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의 영화적 재현(representation)인 셈이지요.

재미있는 건 실제 사건이 영화적인 방법론과 이야기로 재구성 되어 스크린에서 상영될 때, 이것이 관객 개개인으로 하여금 현실에서 인지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인상을 주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명량>이 극장에 걸리기 전까지 417년 전에 일어난 전투 하나를 특별하게 여긴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겁니다. 이것은 파편처럼 흩어져있는 딱딱한 사실들을 받아들이기 쉬운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해서 제공하기 때문에 얻는 효과입니다. 이를테면 먹기 좋은 가공식품인 셈입니다. 그러나 논에서 자라는 벼와 전자렌지 속의 즉석밥이 별개 차원의 전혀 다른 물질인 것과 마찬가지로, 재구성된 영화는 실제 사실과는 또 다른, 혹은 전혀 다른 새로운 무엇입니다. 타이타닉 침몰 사고는 5만 2,000톤의 호화 여객선이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면서 1,517명이 사망한 사건이지만 영화 <타이타닉>은 비극적 사고 속에 꽃핀 젊은 남녀의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제보자_포스터

영화 <제보자>는 2005년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조작 스캔들을 소재로 다룬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것은 PD 박해일과 제보자 유연석, 조연출 송하윤의 미모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그래서 어쩌면 재연 다큐멘터리라고 부르는 게 더 잘 어울릴 정도로 실제 사건의 추이를 그대로 따라가며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지고 세계 과학계를 선도하는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던 2005년 당시의 황우석 박사를 두고, 실상은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셈이었던 당시의 <PD수첩>은 엄청난 역풍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영화 속에 표현된 정도가 훨씬 약할 정도로 당시 MBC와 PD수첩 제작진을 향해 쏟아지는 분노와 질타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방송국의 특정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많은 국민들이 그렇게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죠. 그럼에도 <PD수첩>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사건의 실체는 지금 우리 모두가 아는 그대로입니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요제프 괴벨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 요제프 괴벨스

제보자_누가이렇게

<제보자> 관객의 대부분이 이러한 실제 사건의 시작과 끝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기억하는, 불과 10년도 되지 않은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가 울림을 줄 수 있는 까닭은, 영화 속에서 보여주고 있고, 9년 전 거기 실제로 있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기대2)하는 ‘진짜 언론’의 모습을 지금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과 TV를 켜고 쏟아지는 콘텐츠들을 보면 사정은 달라도 심하게 다릅니다. 카메라는 시사회 무대를 오르는 여자 연예인의 “난감한” 치마 끝이나 걸그룹 꽁무니 쫓기에 바쁘고 정치인들은 364일 싸우다가 국회의원 세비 올리는 하루 동안 단합하고, ‘외노자’ 범죄는 또 어찌 이리 심하고 흉폭하답니까. 미디어는 섹시와 혐오, 논란을 팝니다. 연예인의 사생활, 정치에 대한 혐오, 일본과 중국의 망언은 가장 좋은 장삿거리입니다. 없는 ‘논란’도 만들고, 모르는게 나을뻔 했던 헛소리는 크게 부풀려주고3), 갑자기 ‘충격’도 주고, 별로 안 궁금한데 애써 답을 감춥니다. 누구인지도 모를 네티즌 반응은 없으면 큰일날 것처럼 꼭 붙습니다.

미디어는 구조적인 문제를 파헤치고,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영웅이나 악당을 만들어 사건을 단순화시키고, 맥락을 없애며 개별의 의미를 고립시키고, 본질을 찌르는 대신 변죽을 울립니다.

좋겠다 동갑이라서

..좋겠다 동갑이라서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긴급]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아, 물론 선정적인 가십거리와 성 상품화, 클릭장사 등 미디어가 할 수 있는 온갖 싸구려 장삿속이 2005년 그때도 만연해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그런 반대편 한 켠에는 거대한 황우석 신화의 거짓됨을 감히 고발한 MBC <PD수첩>이 있었지요. 바로 지금, 주류 미디어에 우리 사회의 거대한 현재진행형의 거대 현안에 대해서 고발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방송할 수 있는 탐사 저널리즘이 실재한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겁니다. MBC, YTN, KBS가 어떻게 망가졌는지(물론 혹자는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상기한다면 더더욱 명료해지는 문제입니다.

그런 사정으로, 2005년의 제보자4)와는 달리 2014년의 제보자는 자신의 고발을 귀담아 들어주고 세상에 알려줄 저널리즘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보자는 있되, 미디어는 없습니다. 이것이 지난 9년간 달라진 사정이고, 이런 이유로 영화 <제보자>는 현실을 재현하고 있지만 더이상 현실과 같지 않은 영화가 됩니다. 조금 과장된 수사법을 동원한다면, ‘2014년 한국형 언론 판타지 영화’라고 할까요.

영화 <제보자>는 제목과는 반대로 제보자 유연석보다 실상은 PD 박해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내부고발자, 공익제보자보다는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진 언론인에 중심이 실려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제보자>인 까닭에, 앞서 언급했던 현실 저널리즘의 부재를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제보자_포스터2

 

 

주1)

최근 몇 년간 한국영화계의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비교적 최근의 사건들이 영화화 되었다는 점입니다. <도가니> <두 개의 문> <남영동 1985> <변호인> 모두 가까운 과거의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실제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와는 다른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반화한 경향으로 단정지어 말하기엔 조심스럽지만, 최근 헐리웃에서 주로 제작되는 영화들이 완전한 가공의 이야기거나 (어벤져스로 대표되는 슈퍼히어로물 등)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해도 특정 인물을 다룬 전기적 영화인 반면(마크 주커버그, 빌리 빈, 스티브 잡스) 한국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어둡고 무거운 현대사의 사건들을 소재로 하는 차이를 보이는 걸로 ‘보이기도 합니다.’

주2)

현대 민주사회에서 살고 있는 일반적인 시민들의 언론에 대한 이상적인 기대치를 미디어 규범이론으로 설명하자면 ‘사회책임 이론’에 가까울 것입니다. 1947년 미국 언론자유위원회(위원장 시카고대학 로버트 허친스 총장)이『자유롭고 책임지는 언론(A Free and Responsible Press)』라는 보고서를 통해 발표한 이 이론에 따르면 미디어는 정보성, 진실성, 정확성, 객관성, 균형성 등에 있어서 높은 수준의 윤리적, 직업적 기준을 가집니다. 미디어는 사회의 다원성을 반영하고, 다양성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반론도 소개해야 합니다. 언론인들은 그들의 고용주를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공익적 가치를 추구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주3)

세간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망언이나 악행을 저지르는 방법으로 미디어를 이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에 반대되는 좋은 저널리즘의 예를 소개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ISIS가 민간인들을 납치해 참수하는 끔찍한 영상을 퍼트리는 이유는 그들의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영국언론 ‘인디펜던트’는 참수 소식을 전하되, 그들의 선전(PROPAGANDA)은 전하지 않기 위해 관련 사진도, 어떠한 이름과 희생자 정보도 전하지 않았습니다. “Here is the News. Not the Propaganda” (via Twitter @kkendd)

제보자_인디펜던트

주4)

미국, 영국 등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비교적 폭넓게 향유되어온 국가와 달리, 한국은 공익제보자, 즉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에 대한 보호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내부자만 알 수 있는 비리와 부정을 개인의 이득이 아닌 양심이나 공익을 위해 고발했음에도, ‘배신자’ 취급을 당해 대부분은 좋지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조차 고발의 단위가 대(對) 국가 규모로 커지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첼시 매닝으로 성전환을 한 미군 육군사병 브래들리 매닝은 위키리크스에 정부기밀문서를 폭로한 죄로 20개의 혐의를 받아 2013년 8월에 3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입니다. 그가 위키리크스를 통해 폭로한 문서에는 미군 부대와 CIA 등이 국제인권법을 위반한 소지가 있는 내용과 바그다드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영상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닝 뿐만 아니라 위키리크스의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도 쫓기는 몸이 되어 런던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 피신해 있습니다.

또,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내부고발자인 에드워드 스노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스노든은 미국 NSA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불법 감시를 하고 있다는 증거를 담은 기밀문서를 영국 언론 가디언에 넘겼습니다. 스노든은 러시아에 임시 망명 중인 상황이고, 가디언은 영국 정부로부터 특정 문서를 파기하라는 등의 부당한 압력과 강요를 받았습니다.

원래의 얘기로 돌아오면, 황우석 스캔들의 제보자는 다른 제보자들보다는 비교적 상황이 괜찮아보입니다. 임순례 감독이 씨네21과 가진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답했습니다.

초기에는 심리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나중에는 잘되어서 마침내 자신을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지금은 교수로 재직하며 외부 활동도 많이 하고 있다. 대부분 공익 제보자들의 끝이 좋지 않다. 하지만 이 분의 경우는 영화와 다르게 부인과의 불화도 없었고 완전히 재기했다. 본인도 말하기를 공익 제보자가 정상적으로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하더라.”

홍콩: '우산 혁명' 활동가 9명, 유죄를 선고받다
온라인액션 참여하기
세상의 부당함에 맞서 싸웁니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