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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부르지 않는 국가대표

2010 남아공월드컵 가나 대 우루과이 ⓒMichael Steele/Getty Images Europe

2010 남아공월드컵 가나 대 우루과이 ⓒMichael Steele/Getty Images Europe

피파(FIFIA)가 주관하는 경기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배너 문구는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 구호인 “SAY NO TO RACISM”이다. 그러나 매우 모순적으로, 국가대항전인 월드컵은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요소로 가득차있고, 민족국가의 ‘순혈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나 국가주의에 경도되어있는 사람들은 “SAY NO TO RACISM” 배너가 붙어있는 경기장 안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선수들의 애국심을 평가하는 증거로 국가(國歌,National anthem)를 부르는 선수들의 태도를 든다. 국가를 부르는 것이 국가대표 축구경기에서 정말 그렇게 중요할까? 축구에서 인종주의는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가.

 

국가를 부르지 않는 국가대표

브라질월드컵의 8강팀이 가려진 지금, 여기까지 올라온 팀들은 누가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부활한 아트싸커’ 프랑스와 매 대회마다 우승후보로 꼽힐만큼 안정적인 전력을 과시하는 ‘전차군단’ 독일이 특히 브라질의 우승을 저지할 수 있는 유력한 팀으로 꼽을만하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은 8강에서 만나게 되어 둘 중 하나는 먼저 브라질을 떠나야하는 처지다. 축구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8강 대진 중에 가장 빅매치임에 틀림없는 경기가 바로 프랑스-독일전이다.

그런데 프랑스와 독일의 경기전 의례를 유심히 관찰한다면 다소 특이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바로 몇몇 선수들이 국가를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프랑스에서는 벤제마가 그렇고 독일에서는 외질, 케디라, 보아텡, 포돌스키가 그렇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주제와는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월드컵이 개막하기 전 한국팀이 치른 튀니지와의 평가전에서 기성용이 국민의례를 하며 가슴에 손을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얹어 한차례 홍역을 치른바 있다. 그만큼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가 국제무대에서 의례를 취하는건 사람들에게 여전히 대단히 중요하고 엄숙하게 여겨지는, 일종의 신성한 영역인 모양이다. 예컨데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태극기가 잘못 그려지거나 애국가가 잘못 연주되기라도 하면 굉장히 모욕적이고 불쾌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단순히 주최측의 실수도 아닌, 자국의 국기를 가슴에 달고 나간 선수가 일부러 의식적으로 국가제창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 아닐까?

도대체 왜 벤제마와 외질은 국가를 부르지 않는가? 국가를 부르지 않는 이들에게 국가대표의 자격은 있는가? 한국에도 이와 같은 선수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용납할 수 있는가?

브라질월드컵 나이지리아전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고 있는 벤제마(오른쪽). 그가 국가를 부르지 않는 것에 대하여 프랑스의 극우정당 '국민전선'은 그를 대표팀에서 제외해야한다며 공격했다. 벤제마는 “나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국가 제창이 아니라 팀 전체의 결속이다. 나는 프랑스를 진심으로 사랑하니 국가를 따라부르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뭐라해선 안될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생각이 중요하지 입모양이 중요한가” 라고 말했다.

브라질월드컵 나이지리아전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고 있는 벤제마(오른쪽). 그가 국가를 부르지 않는 것에 대하여 프랑스의 극우정당 ‘국민전선’은 그를 대표팀에서 제외해야한다며 공격했다. 벤제마는 “나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국가 제창이 아니라 팀 전체의 결속이다. 나는 프랑스를 진심으로 사랑하니 국가를 따라부르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뭐라해선 안될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생각이 중요하지 입모양이 중요한가” 라고 말했다. ⓒAFP

브라질월드컵 독일-미국 경기. 좌측부터 보아텡, 외질, 슈바인슈타이거, 포돌스키. 국가를 부르는 선수는 슈바인슈타이거뿐이다.

브라질월드컵 독일-미국 경기. 좌측부터 보아텡, 외질, 슈바인슈타이거, 포돌스키. 국가를 부르는 선수는 슈바인슈타이거뿐이다. ⓒAP Photo

축구는 정말 사회통합에 기여할까?

식민지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프랑스는 그 2세들이 국가대표 축구팀에 진출한 것도 자연히 빨랐다. 옆나라 독일이 국가대표팀의 ‘순혈주의’를 고집한 끝에 2002년에야 처음으로 흑인선수 아사모아를 대표로 발탁한 것에 반해 프랑스는 이미 1998년에 다양한 출신의 선수들로 이뤄진 대표팀으로 첫 월드컵 우승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알제리계 이민2세인 중원의 사령관 지네딘 지단을 필두로 그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1) 자케 감독은 흑인 및 혼혈 선수를 주전으로 상당수 중용하여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지단과 카랑뵈 등은 ‘자랑스러운’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열창하지 않았고, 이는 극우정당 ‘국민전선’등의 열렬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서의 첫 월드컵 우승이라는 달콤한 결실은 모든 비판을 잠재웠다. 이후에도 프랑스 축구 대표팀은 유럽팀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흑인 또는 혼혈선수를 기용해왔다.

1998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대표팀의 일원이었던 크리스티앙 카랑뵈(Christian Karembeu)도 국가제창을 하지 않는 선수였다.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 출신인 그의 증조부 윌리 카랑뵈가 1930년대 세계식민지박람회에서 ‘식인종들’이라는 이름으로 ‘전시’ 되었기 때문이다.

1998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대표팀의 일원이었던 크리스티앙 카랑뵈(Christian Karembeu)도 국가제창을 하지 않는 선수였다.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 출신인 그의 증조부 윌리 카랑뵈가 1930년대 세계식민지박람회에서 ‘식인종들’이라는 이름으로 ‘전시’ 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다문화,다인종 국가인 프랑스에서 사회통합은 국가적 명제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거창하고 아름다운 프랑스혁명 정신의 구호가 무색하게 이민자 갈등으로 심각한 골머리를 썩고 있는 프랑스 정부에 98월드컵 우승은 아주 훌륭한 소재였다. 다양한 이민자 출신으로 이뤄진 대표팀이 이루어낸 월드컵 우승! 그것이야말로 프랑스가 곧 똘레랑스의 나라라는 증거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아주 일시적인 착시현상일뿐임이 곧 드러났다.2) 이후로도 프랑스는 이민자들과의 갈등으로 크고 작은 소요사태까지 겪었다. 애초부터 알제리계를 혐오하는 인종주의자들이 지네딘 지단 때문에 새삼 그들의 의견을 번복할리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1) 프랑스 태생이 아니거나, 이민자 가정 출신이거나, 부모 중 한쪽이 프랑스 국적이 아니거나, 혼혈인 경우 등을 모두 고려한다면 프랑스 대표팀을 거쳐간 선수들중 ‘순혈’을 찾기가 오히려 더 힘들 정도다. 1998년 우승멤버 중에는 드사이(가나), 리자라쥐(바스크), 튀랑(과들루프)이 그렇고 유로2000을 우승을 합작해낸 피레스(포르투갈)와 트레제게(아르헨티나)도 그렇다. 또 마케렐레(콩고)와 비에이라(세네갈), 그리고 무한도전 출연으로 국내에서 축구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티에리 앙리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지금은 프랑스 해외영토에 속해 있는 과들루프(아버지)와 마르티니크(어머니) 혼혈이다.

2) (…전략) “프랑스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하자 이를 두고 프랑스 정부는 인종통합 정치의 승리라고 포장해댔다. 대학교들은 앞다투어 1998년 월드컵의 우승이 통합정책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연구하는 정치학의 새로운 분과를 신설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3년 뒤 거리에서 그 실체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민자들이 밀집해 살던 파리의 외곽지역에서는 불길이 치솟았다.” (피파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돌베개)

 

축구는 내셔널리즘의 총체

다시 2014 브라질 월드컵으로 돌아와서, 이번 월드컵에서는 유난히 열광적인 국가제창 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모든 나라의 국가의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피파(FIFA)는 국가 연주시간을 90초로 제한하고 있는데, 홈(Home) 경기나 다름없는 자국 관중들로 가득찬 남미팀들은 정해진 90초간의 공식연주가 끝나고도 무반주 ‘쌩목’으로 2절까지 단체로 열창, ‘떼창’하는 인상적인 광경을 연출했다. 선수들중에도 이미 이때부터 감격에 벅차 눈시울을 붉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다.

브라질은 선수들과 관중이 하나가 되어 열광적인 국가 제창 모습을 연출했다. ⓒFIFA

브라질은 선수들과 관중이 하나가 되어 열광적인 국가 제창 모습을 연출했다. ⓒFIFA

브라질의 스타 네이마르는 국가를 부르다가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보였다.

브라질의 스타 네이마르는 국가를 부르다가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보였다.

국가제창 도중 눈물을 보이는 코트디부아르의 세레이 디에 ⓒgettyimage

국가제창 도중 눈물을 보이는 코트디부아르의 세레이 디에 ⓒgettyimage

어쩌면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이곳은 현대사회에서 단체로 ‘국뽕’을 맞아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유일한 합법의 공간이 아닐까? (‘국뽕’은 나라 ‘국’과 마약류를 뜻하는 은어 ‘뽕’을 합친 웹상의 신조어로 애국심에 비이성적으로 도취되어 있는 상태를 비꼬는 말이다) 근대적 개념의 민족국가가 성립된 이후, 한때 기승을 부렸던 각 나라의 애국주의는 인류공멸의 위기감을 느끼게 했던 2차대전과 비약적인 통신-미디어의 발달을 겪으며 점점 더 낡은 것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의 눈이 실시간으로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고 있으며, 경제와 문화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금의 글로벌 시대에 ‘우리나라가 최고’라는 자아도취적 애국심은 더이상 공공연히 꺼내놓을 수 없는 멋없고, 낡고, 구린 어떤 것이다. 어느 나라건 그런 민망한 짓은 현실감이 제로에 가까운 극우단체나 할 뿐이다. 그런 짓을 아직도 대놓고 단체로 뻔뻔하게 하는건 이제 북한 정도 뿐이다. 각종 중화기와 미사일 등을 늘어놓고 퍼레이드를 펼치며 “우리 조국은 강하고 위대해!”라고 자위하는 북한을 바라보며 “아 북한은 정말 대단하구나”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축구장에서만큼은 스포츠라는 얄팍한 이름 아래 이러한 단체 애국주의를 마음껏 표방해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축구장이 아닌 어떤 자리에서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이 단체로 국가를 ‘떼창’하는 모습이 이상해 보이지 않겠는가. 축구하기 전에 시원하게 ‘국뽕’을 한사발 들이키는 이 세레머니는 월드컵 흥행의 결정적 요소가 실은 내셔널리즘에 기반하고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정말 최고의 축구를 보고 싶다면, 국적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과 명성으로 선수를 구성하는, 이를테면 레알 마드리드 같은 세계 최고의 클럽들을 모아놓고 경기를 하는게 더 수준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피파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국가의 대표팀이 되어야 평소에 축구를 보지 않는 사람도 월드컵을 보고, 거기에 기업들이 수백,수천억을 들고 달라붙는다. 이것이 국가대항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지어 심판의 국적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축구와 관계없는 역사적인 사실까지 가져와서 대리전을 치른다. (이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선 좀 더 부연설명이 필요하지만, 그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투박하게 결론을 말한다면) 피파가 주관하는 월드컵의 가장 핵심적인 흥행비결은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는 축구스타도, 멋진 골도, 수준 높은 경기가 아닌 바로 내셔널리즘이다. 자연스럽게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축구장은 미사일 대신 축구공이 날아다니는 국가간의 전쟁터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 애국심을 빼먹은 선수가 출전한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지”

2002년 월드컵 이후로 국내 방송사들은 스포츠 중계의 자막에서 '한국' 대신 '대한민국'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축구에 머물렀지만 곧 모든 종목으로 퍼졌다. 그냥 '한국'으로 쳤다가 관계자에게 혼나고 '대한민국'으로 수정해야만 했다는 방송국 자막제작자의 증언까지 듣고보면, 스포츠에서 바라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감이 온다. (ⓒSBS 캡쳐화면)

2002년 월드컵 이후로 국내 방송사들은 스포츠 중계의 자막에서 ‘한국’ 대신 ‘대한민국’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축구에 머물렀지만 곧 모든 종목으로 퍼졌다. 그냥 ‘한국’으로 쳤다가 관계자에게 혼나고 ‘대한민국’으로 수정해야만 했다는 방송국 자막제작자의 증언까지 듣고보면, 스포츠에서 바라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감이 온다. (ⓒSBS 캡쳐화면)

내가 노래를 못해도

한국에 2:4 패배라는 아픔을 준 알제리 대표팀에도 유난히 국가를 안 부르는 선수들이 많다. 아마도 이중국적자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국적도 2개고, 알제리에서 자라지도 않았는데 알제리 국가를 반드시 불러야할 기분이 별로 들지 않는게 자연스럽다고 봐야할 것이다. 처음 언급한 프랑스나 독일을 비롯한 다른 ‘국가를 부르지 않는 국가대표’들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어떤 선수들은 단지 축구를 하기 전에 노래를 한다는 것이 어색한건지도 모른다. 단순히 노래 부르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고, 어쩌면 축구하기 전엔 그냥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지도 모른다. 혹시 음치라고 놀림 받은 어린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는지도 모르고, 가사가 별로 와닿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모를 일이다. 요컨대, 반드시 지켜야만하는 대단하고 굳건한 신념이나 사상이 있어서 국가를 부르지 않는 선수는 사실상 아무도 없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축구이고 오늘 경기에서의 승리일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지극히 사적인 동기로 국가를 부르지 않은 특정 선수의 행위는 그가 국가대표로서 월드컵 무대에서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되어 미디어와 애국주의자들에 의해 스캔들이 되고 비난의 표적이 된다. 이 얼마나 맥락 없고 제멋대로이고 무례한 ‘사실’이란 말인가.

'그라운드의 모짜르트'라는 별명이 있는 체코의 토마스 로시츠키는 유로2012 경기에서 국가를 제창하지 않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며 자국에서 비난을 받았다. 로시츠키는 자신이 비애국자가 아니며, 자신이 국가를 부르지 않는 이유는 입을 열어 국가를 부르면 항상 팀이 지는 징크스 때문이라며 "마음속으로는 국가를 항상 부른다"고 '굳이' 설명해야만 했다.

‘그라운드의 모짜르트’라는 별명이 있는 체코의 토마스 로시츠키는 유로2012 경기에서 국가를 제창하지 않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며 자국에서 비난을 받았다. 로시츠키는 자신이 비애국자가 아니며, 자신이 국가를 부르지 않는 이유는 국가를 부르면 항상 팀이 지는 징크스 때문이라며 “마음속으로는 국가를 항상 부른다”고 굳이 설명해야만 했다.

한국축구의 구세주가 혼혈이라면

좋든 싫든 한국사회의 다문화인구는 상당한 규모가 되었다. 국내거주 외국인 인구는 올해 1월 1일 기준으로 156만명을 돌파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전체 주민등록인구 5114만 1463명 대비 3.1%의 수준이다. 이는 대전(153만)과 광주(147만)보다도 많은 것으로 그중 외국인 주민의 자녀는 20만명에 이른다. (외국인 주민이란 장기체류 외국인, 귀화자, 결혼이민자, 외국인 주민 자녀 등을 총칭한다)

이제 그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사회의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어떤 사회인가. 한국에서 나고 자란, 톱레벨의 인기연예인 조차 화교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악담의 대상이 되는 사회 아니던가. 소수자에게 숱한 차별과 장벽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더군다나 더더욱 폐쇄적인 스포츠계에서 그런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두각을 나타내기란 흑돼지 바늘 통과할만큼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물며 이번 월드컵 대표팀에서도 K리그 초유의 기록(10경기 연속 공격포인트)을 세우며 최고의 활약을 펼친 이명주가 탈락하며 축구 국가대표가 되는 것에는 실력 이외의 변수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는걸 여실히 보여준 현실이라면 더더욱 그렇지만. 그러나 현실을 이기는 압도적인 재능이란건-지네딘 지단처럼-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일이 여전히 다가오지 않는 미래의 가정에 머물더라도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비단 축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느 분야에서라도 ‘국가대표급’의 역량과 재능을 지닌 ‘우리 안의 우리와 다른’ 구성원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이제 하나의 ‘만약’을 질문해보자. 만약, 위기에 빠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구할 에이스가 필리핀 혼혈의 선수라면, 그 선수가 어떤 이유에서든 별로 애국가를 부르고 싶지도 않고 태극기를 향해 국민의례도 하고 싶지 않다면, 국가를 부르지 않는 국가대표를, 당신 안의 ‘대한민국’은 용납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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