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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넘어 배운 한글로 인권을 위해 편지를 쓰다: 행복한 노인학교 탄원편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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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편지쓰기에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은 앰네스티 인턴 생활이 끝나가던 12월 무렵이었다. 두 번만 가면 되는 간단한(?) 캠페인이었고 인턴으로서의 마지막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 나는 기꺼이 이 프로젝트 참여를 수락했다.

진안은 생각보다 멀었다. 정말 멀었다. 나의 한국지리 지식은 ‘도’ 개념에서 멈추기에 진안도 서울 근교겠거니 생각했다. 서울에서 네 시간 반도 넘게 가서야 진안 한글학교가 보일 줄이야.

진안은 추웠다. 우리가 찾아간 한글학교가 있는 마을은 눈길이 닿는 어디든 산이 보이는 곳이었다. 서울과는 다르게 산등성이마다 흰 눈이 얼어 붙어 있었다. 한글학교 건물은 바깥보다 더 추웠다. 먼 길을 온데다 춥기까지 하다보니 꼼짝도 하기 싫었다.

어슬렁 교실을 둘러봤다.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그리신 것으로 보이는 그림들, 조형물들, 시화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평생 처음 크레파스를 쥐어 보셨을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그림을 그리고, 꼼곰하게 색을 칠하시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몸은 여전히 추웠지만 기분은 한결 좋아졌다. 무례하게도 ‘아, 정말 귀여우시다!’는 감탄이 절로 터져나왔다.

곧 첫 번째 학생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처음에는 조금 수줍어 하셨지만 이내 숙제 해온 것을 꺼내 은근히 자랑을 하셨다. 맞춤법은 약간씩 틀리지만 꾹꾹 눌러쓴 예쁜 글씨들이 조로록, 빼곡하게 줄을 따라 서 있었다. 나는 그것을 ‘어휴, 귀여우셔라’하는 마음으로 흐뭇하게 살펴보며 기계적으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한글을 배우고 생각을 글로 남길 수 있는게 정말 자랑스러우신가봐, 많이 칭찬해 드려야지.

그러다가 ‘묘비에 쓰고 싶은 글’이라는 항목에 써오신 할머님의 글을 보고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점잖고 엄숙하게, 그러나 사랑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음성지원’되어 들려왔다. 그 글은 이런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이 넓은 세상에 네 작은 몸 숨을 곳 없다.’ 이 한 줄은 내가 아무리 재간을 부려도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깊이를 보여주었다. 진안, 서울에서 빨라야 네 시간은 더 가야하는 그 시골에서만 평생을 살아오셨지만, 그 분은 한 인간으로서 자신만의 철학과 세계관을 구축하고 계셨다. 지난 반 년 동안 앰네스티 인턴 활동을 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고유한 권리를 배우기도 하고 가르쳐 보기도 했는데, 정작 삶 속에서 만나는 살과 뼈가 있는 분들의 철학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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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은 두 모둠에서 각각 다른 사례를 설명하고 각 모둠 대표가 다른 모둠에 자신이 들은 사례를 직접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내가 담당한 사례는 로마족 어린이들이 교육 현장에서 차별받고 있는 내용이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이 컸던 분들인데다 손주 또래의 아이들이 ‘없다고 괄세 받는'(할머님의 표현을 그대로 따르자면) 내용이라 할머님들의 분노가 엄청났다. 나도 글을 몰라 평생을 부끄럽게 살았는데, 요즘 세상에 글 모르는 애들이 어떻게 살겠냐, 그건 다 선생들이 잘못한 거다, 애들이야 뭘 몰라서 괄세한다 쳐도 어른인 선생들도 같이 애들을 괄세해서 쓰겠냐. 어쩜 그렇게 맞는 말씀들만 하시는지 내 속이 다 후련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분노는 고스란히 그분들의 언어로 엽서에 옮겨졌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쓴 것만큼 화려하지 않았지만, 솔직하고 구어적인 글은 분명 힘이 있었다.

진안 한글학교 학생들은 인권의 개념, 역사, 의미 등 지식적인 내용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들은 인간을 대하는 인권적으로 성숙한 태도를 이미 충분히 갖추고 계셨다. 지식적인 내용을 특별히 배운 적은 없지만, 인권은 마을에서 평생 서로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삶의 경험 속에 이미 녹아 있었다.

앰네스티 인턴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은 고민을 했던 지점은 인권이라는 개념이 너무 어렵다는 것, 그래서 이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안에서의 경험을 통해 권리 보유자이자 권리 보호자가 모두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는 것, 다양한 사람들이 특유의 사회적/문화적 맥락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그 누구의 처지도 ‘괄세’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인권은 낙원이 아니라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바로 이 땅 위에서 지켜져야 한다는 소중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다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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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기 인턴 최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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