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인터뷰

뒤돌아보니 운명이었다

한국 인권사의 산 증인

‘시국 사건 1호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뒤돌아보니 운명이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 군사정권은 허울로나마 유지하던 민주주의를 완전히 무너트리고 유신헌법을 선포하며 독재체제를 굳건히 합니다. 하지만 그 해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출범하며 한국 현대사에 본격적으로 인권운동이 태동된 해이기도 합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그늘 속에서 인권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할 수 있다는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앰네스티 한국지부 탄생의 중심에는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시국사건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억울한 이들을 변호해온 변호사 한승헌이 있었습니다. 두 차례의 옥고에도 굴하지 않고 시대의 상처를 묵묵히 보듬어 온 한승헌 변호사는 현재 법무법인 광장에서 고문으로 일하며 법조계와 시민사회의 원로로서 고언(苦言)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고은태 국제집행위원이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산파 한승헌 변호사를 만나 앰네스티의 지난 발자취와 한국 인권사를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하 앰)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4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한국지부 40주년은 앰네스티 전체적으로도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전세계 앰네스티 지부들 중에서도 굉장히 빠른 편이고요. 지난 20여 년간 한국지부처럼 발전한 지부가 하나도 없습니다. 초기에 생긴 소위 선진국 지부들은 쭉 성장해서 자리를 잡았고, 그 외에 제3세계의 지부들은 어려움만 계속 겪어 왔거든요. 한국지부가 20여 년 만에 작은 지부에서 큰 지부로 성장해서 세계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40주년의 산 증인이신 한승헌 변호사님께 인터뷰를 요청 드렸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님은 한국 인권운동의 1세대, 개척자라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은데, 처음에 시국사건 변호라든지 인권문제에 관여하시게 된 계기가 어떤 것인지요.

한승헌 변호사 (이하 한) : 제가 검사에서 변호사로 전업한 시기가 1965년입니다. 당시는 한·일 회담,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이 절정에 이르고, 월남파병이라든가, 국내에서 여러 사회 갈등이 격화된 시기입니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은 독재적인 탄압을 다반사로 감행했고 그 결과로 많은 정치범, 시국사범, 양심수들이 양산이 된 때입니다. 억울한 피해자, 박해 받는 사람들이 줄줄이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그들을 변호해줄 변호사가 많지 않았어요. 그때 마침 내가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되었는데, 시국사범들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당시 독재의 칼날이 제일 처음 표적으로 삼은 것이 작가라든가 언론인이라든가 학자들이었고, 내가 아는 한 작가의 소설 한 편을 놓고 반공법으로 처벌을 하려고 한 것이 제가 시국사건의 변호인석에 서게 된 계기가 되었죠. 한마디로 6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 독재 탄압에 의해 양산된 시국사범과, 변호사로서의 사명감이 맞닥뜨려서 그 후 연달아 시국사범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선 난데없이 당한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쫓아간다, 이런 심정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탄압과 저항이 장기화 되다 보니까 제가 본의 아니게 많이 끌려 다니는 변호사가 되었죠.

 : 저희가 흔히 알고 있는 ‘인권 변호사’라는 개념이 생기기 10년 전에 이미 시작을 하셨는데, 검찰 출신으로 창창한 미래가 보장되어있는 상황에서 결심하시기가 쉽지 않으셨을 겁니다.

: 그때 정권에 미움을 받거나 억압된 사람들을 위해 변호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권력에 핍박을 받고 맨몸으로 법정에 섰을 때, 누군가는 변호도 하고 위로도 하고 힘도 실어주고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언론이나 세간에서는 제가 정의감이나 용기가 남다른 사람인양 미화하는데 그것은 전혀 아닙니다. 우선 당장 어려움을 호소하고 핍박에 신음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응급처치라도 한다고 뛰어 다닌 것뿐인데, 미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세인들이 ‘인권변호사’ 라는 말을 쓰는데, 저는 사실 그런 용어에 대해서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합니다. 한번도 제 자신을 인권변호사라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변호사란 게 본시 인권을 지키고, 인권을 부축해주고, 인권침해를 막는, 그것이 본시 부여된 직분인데, 변호사라는 말에 굳이 인권이란 말을 얹는다는 것은, ‘공 잘 차는 축구선수’ ‘헤엄 잘 치는 수영선수’라는 말처럼 동의어의 반복이고, 듣는 저로서는 민망스럽습니다. 그냥 변호사, 변호인, 그것으로 족합니다.

앰 : 국내 상황이 국제적인 흐름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시대인 70년대 초에 앰네스티 운동에 투신을 하셨는데, 그 시절에 어떻게 앰네스티를 접하고 참여하게 되셨는지요.

: 5.16 쿠테타로 권좌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련의 초헌법적인 조치로 헌정을 유린하는 사태를 야기시키게 되죠. 6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3선 개헌과 같은 정상적인 헌정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일이 터집니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71년이었던가, 순천의 윤현 목사로부터 앰네스티 통신이라는 팜플렛이 하나 배달이 되어서 그걸 읽고 ‘앰네스티’라는 국제 인권 기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뜻이 있는 몇 분이 모여서 이야기를 시작을 하게 되었죠. 한국 앰네스티는 그 출범단계에서부터 폭넓은 각계의 지지와 참여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 공로는 박정희씨에게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처럼 군사독재적인 폭압정치를 반복하지 않았다면 한국 앰네스티에 대한 호응의 폭이나 정도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시의 한국의 상황이 앰네스티가 추구하는 목표하고 역설적으로 잘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박 정권시대엔 정치범에 대하여 사형까지도 서슴지 않는 가혹한 형벌이 남발되었고, 많은 고문이 행해졌습니다. 재판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감자들이 비인도적인 처우를 받았습니다. 이런 참이라서 국제앰네스티가 내세우는 활동 목표가 한국의 반민주적 반인권적 상황에 딱 맞춘 것처럼 느껴진 거에요. 그래서 ‘이거다’하고 앰네스티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죠. 다만 당시 한국 앰네스티는 외국과 달리 출범 초부터 구성원들의 면면이 지도자급 내지 명망가 중심의 조직이 되어있었어요. 이건 한국 앰네스티의 아주 특이한 점이었는데, 그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장점이기도 하고 조직의 구성 체질상의 문제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덕분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비록 독재 치하에서도 국제기구라는 이름을 내세워 활발한 활동을 할 수가 있었어요. 독재정권이 국내에서는 강하지만 국제적인 면에서는 의외로 나약한 데가 있습니다. 그걸 파고 든 것이죠. ‘이건 국제단체의 활동의 일환이다.’ 라는 걸 내세워 유신의 틈에서도 활기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려웠던 점은 앰네스티 활동에 참여하고 지원하는 사람들이나 세력들이 앰네스티가 일종의 투쟁기구가 되길 기대한 것이죠. 우리도 시작할 때 정확히 그것을 분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앰네스티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이상 앰네스티의 활동원칙을 준수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자 앰네스티 외부에서는 물론이고 내부에서도 앰네스티가 일반 투쟁단체처럼 그렇게 나서주기를 기대하고 촉구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습니다. 윤현 목사님을 비롯한 한국 앰네스티 운영의 중심에 있던 몇 사람은 중간에서 고민도 하면서 앰네스티 본래의 활동방식에 대해서 이해를 시키고자 상당한 노력을 했죠.

앰 : 앰네스티 70년대 소식지의 명단을 보면, 마치 한국의 민주화 운동세력의 총 집결체 같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 한국의 반독재 민주세력은 편의상 크게 정치권과 비정치권(재야세력)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그 두 세력을 하나로 포괄하는 그런 자리에 앰네스티가 있었습니다. 정치권의 이른바 거물들, 그리고 재야의 원로 지도자들이 다 앰네스티에 들어왔는데, 출범 당초의 직능별 인적구성을 보면 크게 법조계 언론계 종교계 인사로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제도언론에서 쫓겨난 해직 언론인들도 참여하였는데, ‘한국언론에 비친 앰네스티 5년사’에 실린 당시의 기사를 보면, 압제의 체제하에서도 언론의 반응이 제법 괜찮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앰 :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영어로 된 백과사전을 사오셨는데, 백과사전이 중간중간 시커멓게 먹물로 칠해져 있더군요. 뉴스도 아니고 신문도 아닌 백과사전이. 그렇게 요즘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던 시절인데요, 그런 시절 앰네스티 활동에는 여러 가지 어려웠던 일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 해외 출판물, 신문 잡지 단행본 등을 까맣게 지우는 건 다반사였습니다. 처음에는 해괴한 짓에 분개하다가 나중에는 냉소를 하면서 둔감해졌습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들어올만한 간행물들은 어떻게든 들어오고 우리가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검정에 덮인 부분이 있으면 ‘아, 여기야 말로 우리가 읽어 봐야 할 대목이구나’ 하고 더 눈여겨보게 되지요. 결국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고, 우리는 알 것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해외정보를 우리가 접하는 경로는 주로 선교사나 목사님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종교계는 전면적으로 탄압은 못하니까 상대적으로 운신의 폭이 남아 있는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은 해외와의 소통이나 왕래가 유지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 편을 통해서 정보나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앰 : 앰네스티 활동을 하시던 분들 중에는 내란음모의 혐의로 잡혀가신 분들도 있었지요?

: 한국 앰네스티는 여러모로 많은 감시와 회유, 탄압을 받으면서도 제 할 일을 상당히 잘해나갔습니다. 정치범,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국내외에서 보내온 도움으로 변호인 선임도 하고, 영치금이나 영치물도 넣어주고, 가족에 대한 생계보조와 석방된 사람들에 대한 직업훈련도 지원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캠페인을 통해 사형폐지와 고문반대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왔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한국 앰네스티가 민주화와 인권의 향상에 이바지 한 바가 상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정부 권력, 특히 ‘남산’으로 별칭 되는 당시 중앙정보부와 경찰의 감시와 공작, 회유의 대상이 되어왔었죠. 한국앰네스티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어려운 국면이 많았습니다.

특히 80년 5월 정기총회를 3일 앞두고 제가 5.17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남산에 붙들려가서 계엄당국의 조사를 받을 때 맨 처음엔 한국앰네스티 활동이 ‘용공적’ 이라는 혐의를 가지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한국에서 당신네들이 말하는 양심수라는 것은 반국가사범이다. 반국가사범을 돕는 것은 이적, 용공이다.” 라는 식이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인혁당이나 남민전 사건까지 다 도왔거든요. “이건 천하가 다 아는 반국가적 범죄인데, 이걸 도와주고 가족의 생계비 보조까지 한 것은 완전히 이적이다.”라고 하면서 몰아붙이려 하더군요. 그리고 나서 또 횡령사건으로 얽으려고 했지만, 그것도 잘 안되자 이번에는 형법상의 내란죄를 들이대더군요. 결국 앰네스티에 연관된 조사는 없었던 걸로 하고, 저는 계엄법 위반으로 기소가 되었지요. 어쨌든 초기에는 앰네스티를 잡으려고 했어요.

앰 : 대한민국의 사형제도 폐지운동이 80년대 들어와서 시작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료를 보면 이미 70년대 초에 한승헌 변호사님을 중심으로 앰네스티 한국지부를 비롯해서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활발한 사형제도 폐지운동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형제도 폐지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전개되었나요?

: 한국에서 사형제도의 가장 비극적인 현상은 6.25전란 당시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에 의한 단심제 사형의 집행 남발이었습니다. 동족상잔의 격앙된 전란 속에서 단심재판만으로 불복의 기회도 없이 억울한 사형 집행이 횡행 했으니까요. 국가폭력이 아주 절정으로 치달아 이렇게 야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도 되겠느냐면서 사형제도 자체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진보당 사건을 조작하여 조봉암 선생을 처형한 것은 사법살인의 대표적 사례였지요.

이런 일들로, 누가 꼭 이론으로 정립하거나 운동으로 세력화하진 않았지만 사형제도라는 것이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는 공감대가 광범하게 형성되어 갔습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 그런 사형반대운동을 한 단체의 운동 목적으로 내걸고 처음으로 국가권력을 향해서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은 한국 앰네스티였습니다. 한국 앰네스티 출범 후에 첫 사형폐지 캠페인이 있었는데요, 그 때 사형폐지에 관한 대정부 대국회 건의문이 한국 앰네스티 이름으로 나갔는데, 그 건의문을 제가 작성했습니다. 저는 현직 검사 때도 사형제도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고, 앰네스티 활동과 별개로 사형제도와 관련한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제가 75년 당국의 김지하 변호인 사퇴 요구를 거부했다가 반공법으로 잡혀갔는데, 그때 불씨가 된 것이 사형폐지를 주장하는 수필 한편이었죠. 검사 기소 내용을 보면 “당신은 사형폐지를 주장했다. 따라서 남파간첩의 사형도 반대하는 거니까, 용공이다” 이런 논리였습니다.

그 뒤에 한국 앰네스티가 사형폐지 캠페인을 거듭 펼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인혁당 사건의 비극 등이 반복되어 나왔지만, 그러나 결국 김대중 정부 이후 10년을 사형 집행 없이 지난 것으로 사실상 사형폐지국이 되었잖아요. 이제 사실상이 아니라 법률상으로도 사형을 폐지하는 그런 나라로 나아가는 게 절실한 과제인데, 어떤 정권은 엄단을 내세워서 역시 사형은 집행해야 한다, 사회질서나 국가방어를 위해서 사형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큰 흐름이랄까, 대세는 사실상 폐지에서 법률상 폐지로까지 나아가는 걸로 가닥이 잡혔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사형 폐지에 관한 법률이 국회에 살아있지요? 사형제도는 역시 법률의 문제로 귀착이 되니까 앞으로 의회가 새로 구성이 되고 권력이 새로 재편이 되면 우리가 열망하는 사형폐지가 법적으로 실현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형폐지나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을 범죄로 보고 처단까지 하는 그런 시대는 어쨌든 지나갔지 않습니까. 지금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사형폐지와 국가보안법을 폐지를 권고한 이런 시대니까 그만큼 진전이 있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형제가 살아있냐, 없어졌나, 둘 중 하나만 놓고 단정적으로 어떤 말을 할 것이 아니라, 겉은 아직 남아 있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거의 폐지에 접근하고 있다는 흐름을 살려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변화의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 역사의 진전에는 우리들 자신과 선대 및 동시대의 많은 분들의 절규와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앰 : 60년대부터, 저희 앰네스티 역사로 보면 지난 40년 동안, 한승헌 변호사님께서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 혹은 인권 운동에 늘 가장 가운데서, 제일 앞에서, 탄압 받는 위치에서 몸을 던져 오셨는데, 지금 한국의 인권의 수준의 발전 정도, 발전과정에 대해서 총평을 해주신다면.

: 제가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앞장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성격상 리더십, 즉 먼저 일어나 앞장서서 끌고 나가는 힘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읽은 글 가운데 지금은 진보성향의 정치인이 된 유시민씨가 학생시절에 써낸 항소이유서가 생각납니다. 명문이었어요. 거기 보면 자기처럼 평범한 학생이 어떻게 해서 이런 투사가 되었는가를 말하면서. “왜 이 세상이 나 같은 사람을 투사로 만드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저는 온건파이고 앞장서 나서는 성품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앞에 나서는 경우가 거듭되었습니다. 뒷전에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속출했는데, 특히 87년 6월 민주항쟁 때 변호사들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 참여하고 제가 그 상임공동대표가 되어 사상 초유의 변호사 가두 시위에 두 번이나 앞장선 적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변호사들의 전례 없는 집단 가두시위의 선두에서 진압경찰이나 백골단과 맞부딪치다 보니 평소 저답지 않게 야성적으로 변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극단적인 행태였고, 제 본바탕은 조용한 심성에 있습니다. 다만, 몇 십 년이고 양심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꾸준히 행보를 이어오면서 내가 옳다고 믿는 대의를 좇아온 데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운동에는 독불장군식이 아닌 대중적 참여가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6월 항쟁이 그만한 성과라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종래의 시위, 데모세력이 아닌 계층-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원이나 의료인들, 상공인들이 그때 국본 참여 성명을 내고 많이 합류를 했거든요. 그야말로 범국민적인 투쟁의 실질을 갖추었기 때문에 6월 항쟁이 그만큼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 민주정부 10년을 놓고 이런저런 평가도 하지만, 민주세력들이 실제로 국정에 참여하여 자기 역량을 발휘할 기회도 있었고, 그때에 시민사회가 많이 성장하고 체력 단련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넓게 보면 그들이 다 나라를 바르게 끌고 나가는 힘의 원천들이거든요. 흔히 사회형성의 큰 요소로 국가권력, 기업, 그리고 시민세력을 이야기하는데, 힘 있고 당당한 시민세력이야 말로 우리나라 민주화와 정의사회 확립을 위한 큰 디딤돌이요, 재산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현 정부 들어와서 민주주의도 역진하고 퇴색했다고 말하는데, 거기에 구세주로 나타난 것이 SNS입니다. 정치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정치만큼 세상을 바로잡는데 중요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 지식인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거기에 참여를 안하고 투표장에도 안 가는 것이 마치 고고한 초월주의자 같이 잘못 생각되던 그런 풍조가 상당히 있었습니다. 특히 20~30대의 저조한 투표율에서 많은 실망과 개탄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SNS 같은 새로운 혁명적인 이기(利器)에 의해서 많은 젊은 세대가 정치에 관심을 갖고 투표장으로 가고 일상적인 여러 문제에 의사형성을 하는 것,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를 바로 잡는 데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새로운 큰 흐름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앰 : 그렇다면 오늘의 앰네스티가, 이 다음 단계에 추구해야 할 것은 어떤 게 있을까요.

: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많이 성장했지만 한국사회에 더 넓게 뿌리를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분야에 앰네스티의 얼굴과 흔적이 뻗어나가는 것이 참 중요하거든요. 두 번째로는 지난날 우리나라는 해외 앰네스티에 걱정만 끼치고 도움을 받아왔는데 이제 우리도 이만큼 민주주의와 인권을 확립한 나라의 앰네스티답게 해외의 양심수와 압제의 피해에 대해서 더불어 걱정을 하고 비단 탄원엽서를 보내는 것 말고도, 상대국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원도 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인권상황이 열악한 국가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거기에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손길을 뻗치고 보다 적극적인 도움을 주자는 말씀입니다. 앰네스티 운동을 저는 ‘국제적 품앗이’라고 표현합니다. 국제적인 품앗이를 하는데 우리가 이제 좀 더 선도적인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앰 : 만약 인생을 다시 산다 해도 그 힘든 길을 다시 가실 건가요? 아니면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으신가요?

: 다시 태어나도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변호사는, 자기 생활을 지탱하면서 맘만 먹으면 남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헌신을 할 수가 있는 직업입니다. 변호사에게는 본래의 변호사 업무뿐 아니라 변호사의 전문성과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 해야 될 일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서 변호사가 됐는데 그 때도 역시 박정희 군사 독재를 비롯한 탄압정권이 생긴다면 저는 또 예전의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겠지요. 내가 과거 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시국사범 변호라는 것은, 처음엔 운명이 아니고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십 년 지난 뒤에 되돌아보니까 그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고 내 운명이었습니다. 그런 지난 날의 운명처럼 내 변호사란 직업과 독재정권이라는 권력악이 또 만나서 부딪친다면 나는 결국, 지난 몇 십 년 동안 걸어온 그런 길을 다시 갈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하면서, 그건 나한테 선택이면서 동시에 운명이라고 마음에 새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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